희망의 조각들

by 센터 posted Jul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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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현 한국노총 미조직비정규사업단 활동가 



첫 직장은 한 회사의 인턴이었다. 일정시간의 교육을 받은 후 부서에 배정되기 전, 어색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내 손엔 명찰 겸 출입증이 주어졌다. 손보다 작은 투명한 네모 안에는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어색하게 웃고 있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혼자 덩그러니 봤을 땐 이상하고 촌스럽던 그 사진이 아래에 직위와 이름, 회사명까지 따라 붙으니 제법 점잖고 괜찮아보였다. 겨우 회사 로고를 매단 플라스틱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데, 그 출입증을 목에 걸던 것이 어찌나 좋았던지 명찰을 손가락으로 쓱쓱 문지를 때마다 상기된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출입증 외에도 내 마음을 빼앗았던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내 지정 좌석에 붙어있던 이름표였다. 사실 출입증보다 더 조악하고 단순한 구조로 만들어진 사소한 것이지만, 이름표로 인해 나는 그곳에 소속되었고, 안정되게 정박할 수 있는 작은 항구를 가지게 되었다. 


인턴으로서의 6개월은 매우 빠르게 흘러갔다. 부서 사람들도 하나같이 친절했고 일에도 곧잘 적응해 좋은 평판도 얻었지만, 정규직 전환이 없는 시한부 고용의 끝은 계약 종료뿐이었다. 이미 알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종료와 함께 순식간에 나의 흔적들이 정리되는 과정을 보는 것은 꽤나 속이 쓰렸다. 특히나 출입증 수거 후 텅 비어버린 명찰 케이스를 보고 있자니 반년 동안 마음과 노력을 쏟았던 순간들과 나의 존재가 이렇게 빠르고 깨끗하게 비워질 수 있다는 것에 망연자실했다. 나의 자리를 지켜주던 이름표 역시 톡하고 손으로 잡아 올리니 말끔하게 떨어져 나왔다. 내가 여기 있었음이 정말 다 사라져버리기 전에 나는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명찰 케이스와 자리를 잃어버린 이름표를 가져가게 해줄 것을 직원 분께 넌지시 부탁했다. 직원은 조금 의아해했지만 '까짓것'이라는 표정으로 수락했고, 나는 그것들을 소중히 챙겨 책상 서랍에 고이 넣어두었다. 


내가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흔적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는 일은 그 이후로도 반복되었다. 다른 회사에서 인턴과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동안 빼곡하게 적었던 업무 수첩들이 그것이었다. 하도 자주 들어 누렇게 변색된 수첩의 종이 한 장 한 장에는 회의 내용과 수행 업무 내용이 휘갈겨 적혀 있었다.


수첩이 채워지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 역시 많이 변해갔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계약직이라도 상관없다고 여겼지만, 결국 계약직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간 운이 좋아 별다른 차별 없이 지냈지만, 고용 형태라는 계급 앞에 사람 간의 관계가 얼마나 얄팍하기 짝이 없는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계약 끝 무렵에는 부당한 상황들에 넌더리가 나 다시는 비정규직으로 살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모순적이게도 개인적 다짐과 달리 세상은 ‘정규직’이라고 규정된 기회조차 잘 내주지 않았다.


기자회견.jpg

2015년 정의당 주최로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청년 비정규직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대기업 청년고용의무제 시행 촉구’ 기자회견.


정규직 일자리를 찾아 수없이 방황하는 긴 시간 동안에도 조심스레 챙겨왔던 과거의 흔적들은 여전히 내 주위에 남아있었다. 계약이 끝난 그 시점부터 본래의 역할을 잃어버린 그것들이 나에게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과거의 물건을 보관하는 것은 그 당시의 감정이나 기억들을 추억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사실 나에게 그것들은 과거에 대한 추억보다는 언젠가는 무엇이 될 거란 미래에 대한 믿음이었다. 비록 지금은 이곳을 떠나지만 언젠가는 돌아와 명찰을 다시 걸 것이라는 믿음, 인턴과 계약직을 하는 동안 배웠던 업무 노하우 혹은 경험에 대한 기록이 정규직이 되었을 때 업무의 길라잡이가 될 것이란 믿음, 그것들에는 다분히 종교적이며 주술적 소망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믿음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흔적들을 적극적으로 다시 들춰보는 것은 꽤나 비참하고 서글픈 기분을 들게 했다. 서랍을 열다가 명찰이나 이름표를 보게 되거나, 다른 책을 찾다가 색 바랜 업무 수첩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추억이라도 본 것 마냥 마음이 찌르르 울려와 서둘러 눈을 돌리곤 했다. 그런 감정을 몇 번 겪고 나서부터 나는 그저 그것들의 존재를 인지하되, 봉인된 소중한 무엇처럼 손대지 않고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래 살고 있던 집보다 자그마한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가족 모두 그간의 묵은 짐은 버리고 실용적인 것을 선별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내 책상에 담긴 물건들 역시 일련의 선별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치고 나니 내 책상 위에는 빈 명찰 목걸이와 이름표, 업무수첩 두 권만이 운명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오랜만에 예의 그때처럼 명찰 케이스를 들어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러 보았지만 전처럼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정해진 자리가 없는 이름표는 길을 잃은 미아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일상적 업무만이 적힌 수첩은 설령 취직을 한다 해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내가 그것들을 보관하며 소망했던 ‘안정되게 일을 하는 나의 모습’이 오랜 시간 실현되지 않는 것을 겪고 나니, 더 이상 그것들에 믿음이나 운을 거는 것이 부질없어 보였다. 숭고하게 바라보고 기도하던 성모마리아상이 그저 오래전 길거리에서 구한, 효과란 전혀 없는 싸구려 부적이 돼버린 것이다. 


생각이 정리되고 나니 몇 년을 보관했던 것을 버리는 것은 1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오래된 것을 비워야 새것이 오는 법’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사실 그건 허술한 자기방어에 불과했다. 그날 커다란 쓰레기봉지에는 기대와 희망의 조각들이 잘게 부서진 채 버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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