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의 집단적 힘이 세상을 바꾼다_정혜원 민주노총 금속노조 국제부장

by 센터 posted Apr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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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정혜원 씨와 같이 일한 건 2009년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 당사국인 한국정부 심의 때였다. 쌍용차 강제 진압과 용산 철거민 사망사건 등 주요 인권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필요한 권고를 받기 위해 한국에서 함께 온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국제금속노련에서 밤을 새면서 일했다.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장면은 두 가지인데, 쌍용차 노동자에 대한 강제 진압 문제점을 한국의 법체계를 모르는 사회권위원에게 잘 설명하기 위해 서로 고민하고 의견을 나눴던 것과 그녀의 조끼다. 그녀는 회의장에 ‘자랑스런 표정으로’ 꼭 금속노조 조끼를 챙겨 입었다. 인터뷰 때 그 이유를 물었더니 금속노조 조끼는 자신의 작업복이기도 하고, 17만 조합원들의 대표, 얼굴이라는 걸 잘 새기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녀의 곧은 마음이 느껴졌다.


인터뷰·정리 : 명숙 인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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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개투 총파업을 보지 않았다면


한국에는 1년 반 정도 머물 생각으로 96년에 왔어요. 한국의 다이나믹한 운동을 보고 1년 반 준비해서 왔지요. 부모님은 한국 사람이지만 저는 미국에서 태어났어요. 한국어는 모르지만 부모님이 살던 데는 어떤 곳인지 알아보자 하는 마음에 왔어요. 

처음 왔을 때 30개 시민단체 리스트를 작성해 직접 찾아가서 알아보고 어디서 자원 활동 할지 정했어요. 참여연대 국제부, 민주노총,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등 여러 국제연대 활동을 하고있는 환경·시민·노동·여성 관련 단체들이요. 이주 노동자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이주 노동자 관련 일을 하는 단체  자원 활동도 했는데 가장 많은 관심이 간 데가 민주노총이었어요. 당시 민주노총은 95년 11월에 만들어져 1년도 안 된 상황이었어요. 자원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안기부법과 노동법이 날치기 통과됐어요. 그 뒤에 파견법이 통과되고 민주노총 간부들이 사퇴하고 총파업을 해야 한다 이래서 그 당시에 위급한 상황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그냥 (미국으로) 귀국해버리는 게 왠지 안 맞다’ 싶었어요. 작은 역량이라도 붙으면 낫지 않을까하는 기대랄까. 힘이 되겠다 싶어서 남았어요. 총파업 때 조합원 참여 중심으로 힘을 발휘하는 걸 보고 제가 생각하는 사회변혁의 상하고 맞다는 생각도 하고. 뛰어난 몇 사람이 베풀 듯 정책을 만드는 게 아니라 집단적인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거니까. 아무튼 노개투(노동법 개악저지 투쟁) 총파업이 없었으면 집으로 돌아갔을 거 같아요.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처음에 자원 활동 시작하면서 말이 안통하니까 많이 힘들었어요. 회의, 이런 건특히 더 힘들고. 책을 빌려서 거의 새벽 3시까지 한국어 공부를 했어요. 단어카드도 만들고. 앞에 ‘비누’라고 한글로 써 있으면 뒤에 ‘Soap’ 이렇게 쓴 카드요. 대화하면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해도 사람들이 되게 바빠서 쉽지 않았죠. 제가 원래 담배를 안 피웠는데 담배를 피니까 계단에서쉽게 대화를 할 수 있었어요. 사람들이 회의시간 중간 중간에 담배 피면서 얘기를나누더라고요. 골초가 됐다가 2009년도에 끊었어요. 


그렇게 민주노총에서 자원 활동하다가금속이 대산별로 출범하면서 옮겼어요. 98년 2월에 민주금속, 현총련, 자동차연맹 이렇게 세 조직이 통합해서 금속산업연맹이 출범했어요. 국제사업을 하려는데 사람이 없어서 국제부를 못 만들고 있었대요. 영어하는 사람이 노조에 잘 안 붙으니까. 당시에 저 말고도 동포인 사람들이 국제연대에 힘을 많이 보탰어요.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국제 담당자도 동포였고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국제사업 간사, 공공연맹도 동포였어요. 당시 산별 만들 때는 경총을 쉽게 사용자 교섭단체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김대중 정부 하에서도 만도기계에서 노동자와 임산부를 포함한 가족대책위도 최루탄 맞으면서 쫓겨나 분노한 데다 IMF위기 상황에 현장 곳곳에 우리들이 효과적으로 대응을 못했다는 고민 속에서 저 자신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금속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지원했어요.


동생 병을 고치고 싶어 꾸게 된 꿈


서울대대학원 사회학과에서 공부했어요. 대학 때는 생화학/분자생물학과가 전공이었는데 한국에 와서 바꾸었지요. 그런데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사태가 발생했는데 연맹 후임자가 매일 당사에서 일할수 없어서 휴학을 하게 됐어요. 복학은 1년 후에 했는데 지도교수도 아프고 남동생도 신장이식 수술을 해야 해서 휴학하느라하여튼 오래 걸렸어요.  

사실 제가 미국 하버드대에서 생화학과를 전공한 것도 동생 때문이었거든요. 제 동생은 한두 살 때부터 아팠어요. 희귀한 자가면역질환 문제여서 자기 신장을 외부 세균으로 파악하고 자기면역체가 자기 몸을 파괴하는 면역 체계 문제였어요. 부모님은 맞벌이 부부였고 언니는 첫째라서 그런지, 남동생과 여섯 살 터울인 제가 주로 돌봤어요. 남동생이 아파서 입원을 하게 되면 거의 아동 암병원 이런 데서 치료받아요. 머리가 삭발된 아이들이 수술 받거나 죽는 걸 보고 ‘아, 희귀병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이런 병들이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하게 하는구나. 훌륭한 과학자가 돼서 이런 병을 낫게 해야지’ 싶었어요. 그때 생각으로는 의사는 그때그때 병을 치료하지만, 과학자는 고통을 근본적으로 덜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과학자의 꿈을 꿨어요. 


대학교 다니면서 연구소에서 새로운 약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에 함께 했어요. 일부지만 남동생이 지금 먹고 있는 약에 대한 것이었죠. 남동생이 처음 먹은 약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는데 당시 개발하고 있었던 새로운 약은 남동생 오는 날 개발되었어요. 그걸 학사논문으로 했어요. 하버드대니까 워낙 훌륭한 연구소들이 많다보니 다들 혹시 내가 노벨상 타는 거 아니야 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과학을 시작했을 때는 과학이 뭔가 객관적이고 깨끗한 이미지였어요. 그런데 약간 높은 경쟁 체제의 연구소라 그런지 사람들이 서로 인정을 받으려고 남에 대해 잘못하는 경우도 많고 환경에 대해 무책임한 경우도 많아서 과학에 대한 환상이 깨졌어요. 예를 들면 방사선을 많이 쓰는데 빨리 실적을 내려고 방사선을 깨끗이 처리하지 않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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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8일, 한국지엠 공장 폐쇄 철회, 구조 조정 저지 금속노조 결의대회에서 프랑스 금속연맹 소속 르노 동지, 전미차노조 동지와 국제통합제조산별노련 자동차국장 국제연대 발언에 함께 무대에 올라간 정혜원 국제부장.


하버드대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


그리고 하버드대에 가서 문화적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오클랜드, 샌프란시스코 및 인근 도시에서 자라서 리버럴하고 옛날에 이민자들이 많은 동네라 봉제 마찌고바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도 공립학교에 다녀서 부모님이 일하는 마찌꼬바에 가서 실밥 뽑고 그랬는데 하버드대 가니까 다른 거예요. 저희 고등학교 화장실에는 마약 팔고 사람들이 들어와서 이런저런 폭력 휘두르고 그러는데, 좋은 학교 가니까 사람들이 다 마찌꼬바에서 실밥 뽑고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죠. 이민자들의 자식 문화에서 백인 기독교 전통 대학을 가니까 깨달은 게 많았죠. 


제 룸메이트는 남자 친구랑 바하마로 놀러가지 못하게 부모님이 신용카드 못 쓰게 한다고 불평했어요. 저는 생활비도 써야 하고 책도 사야 하니까 장학금을 받아도 모자라서 아르바이트  다섯 개를 하는데 말이죠. 그리고 저희 부모님이 어렵게 돈을 모아서 타자기를 사줬는데 룸메이트는 “타자기 너무 시끄럽다, 컴퓨터 안 사냐!” 그러고. 다른 사람들은 다 컴퓨터를 쓰고 있었거든요. 학교 측에서는 사람을 서로 섞이게 하려고 그렇게 방 배정을 한 거 같아요. 2학년 때는 룸메이트를 직접 정하니까 나았어요.  


그 외에도 대학 다니면서 느낀 건 젠더에 대한 깨달음이랄까? 하버드대는 아무래도 보수적인 데라 남자만 가입할 수 있는 클럽이 있었어요. 원래 예일대를 가고 싶었지만 예일대보다 하버드대가 장학금을 훨씬 더 많이 줘서 간 거거든요. 미국의 여성주의는 어떻게 보면 주류 페미니즘이었고, 그게 계급 현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비판적으로 나온 페미니즘도 있어요.약간 계급 문제와 인종 문제 등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억압 체계를 바라보는 페미니즘도 있어요. 그런 데랑 어울리기도 했죠. 생각해보면 고등학생 때부터 약간 삐딱했던 거 같아요. 고등학교 마지막 시험때 이라크전쟁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그때 시험 답안지 다 채우고 마지막 줄에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무의미하게 시험을 보느냐’ 고 쓰고 나왔어요. 사회에 관심이 많고 비판적이었지요. 


학교 때부터 노학연대 같은 것도 했어요. 샌프란시스코에서 노조가 없는 봉제작업을 하는 이민 여성들이 임금 체불을당해서 그걸 원청업체에 책임지라고 요구하고 알리고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활동했어요. 풀뿌리 여성들을 조직하고 그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힘이 되려고 거기서 2년 정도 살았어요. 이민 여성들, 아주머니 노동자들을 조직하는데 기여하며 살겠다고 단체에도 들어갔어요. 실리콘벨리에는 한국 아주머니들이 미국 공장에서 많이 일했어요. 대량  생산하기 전 작은 공장이요. 공장 주차장에 유인물 돌리고 생활영어 같은 야학하고. 그때 한국 운동에 대한 소식을 접했어요. 


달라져야 할 국제연대


금속노조에 들어와서 잘하고 있는지 늘 반문해요. 스스로 중앙에 있을 자격이 있나 하는 고민도 들고. 산별노조이면 정책적 역량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거 같고, 국제부도 혼자라 다양한 분야의 일을 소화해야 하기도 하고 어려운 게 많지요. 옛날 국제부 활동할 때와 지금 상황은 많이 달라졌어요. 그때는 민주노총이 합법적 지위를 얻지 못했을 때라 해외 지원과 연대가 한국 활동에 힘이 됐지요. 그런데 지금은 합법적 지위가 있으니까 달라져야 하는데 충분히 그런 거 같지는 않아요. 여러 재벌이 다른 나라에서 수탈과 착취를하는데 관심 갖고 연대해야 하는데 자그마한 실천이 되게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대한민국 경제적 위치는 세계에서 매우높아요. 현대, 삼성, 포스코 같은 큰 기업이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데 노동자 연대를 잘 못하는 거 같아요. 포스코터키 공장에서 80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고싸우는 노동자에게 살수차를 동원해서 탄압하는데 우리는 큰 힘이 되지 못했다 싶어요. 사람들이 자기가 어려운 처지에서일하다 보니 다른 나라 노동자들이 얼마나어려운 상황에서 일하는지 몰라요. 아시아 지역은 전 세계적 공장인데 독재 정권들의 잔재가 많아서 처참하고 노조 활동도하기 어려워요. 그 지역의 수평적 연대를만드는데 역할을 해야 해요.


우리가 조금이라도 역할을 하려고 2007년에 민주노총에 제안해서 동남아시아에서 어렵게 노조 활동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소통 채널을 만들었어요. 민주노총과 금속노조가 돈과 실무력을 모아내서 동남아시아 민주노조 활동가 교육·교류 프로그램을 시작했어요. 초기 교육·교류 프로그램에서 같이 토론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자국에 돌아가 이러저런 큰 역할을 하더라고요. 지금은 프로그램이 확대되고, 다른 산별연맹도 참가하고, 사람들 간에도 소통이 시작돼서 뭔가 활동 흐름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요.  


몇 년 전에는 현대차 아산공장 비정규직여성이 성희롱을 당해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했다가 해고당한 사건 때 국제연대의 힘을 느꼈어요. 당시 현대차 주식을 많이 가진 연기금이었던 스웨덴의 AP7 대표이사가 이 문제에 관해 한국까지 와서 현대차에 면담을 신청했어요. 현대차는 주주들에 대해서 부담이 없는지 거절했어요. 그런데 미국 전역 현대차 판매소 앞에서 노동자들이 1인 시위를 했죠. 미국 언론에 보도되자 바로 다음날 현대차 글로비스가 금속노조에 협상하자고 전화했어요.그때 참 보람도 느꼈지만 씁쓸했어요. 사실 멀고 먼 바다 건너 미국의 정규직 자동차 노동자들이 1인 시위를 하는 것도 좋지만 바로 옆의 노동자가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니까. 내가 조직국장이 아니라 국제부장이니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걸 하자 이렇게 위로했어요.  


개인적으로 쌍용차 투쟁 때 많이 힘들었어요. 비정규직들이 해고되기 시작되어 함께한 점거 파업은 쌍용차 주체들이 열심히 준비한 모범적인 투쟁이었는데, 노동자들이 공장 안에서 고립되는데도 금속노조가 사회적 파장으로 만들지 못했잖아요. 결국 나중에 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죽은 사람 중 어떤 사람은 통장 잔액이 2만 원이더래요. 정말 힘들어서 살 수 없었던 거죠. 그때 금속노조가 열심히 했으면 그 사람들이 안 죽어도 됐지 않았을까 자책을 했어요. 유엔에도 건강권에 관한 진정서도 넣고, 일주일 만에 브라질 노동자들이 쌍용차 남미 대표 대리점 앞에서 100명 시위도 조직하고, 이리저리 많이 국제연대 활동도 했지만 자책감이 굉장히 컸어요.   


쌍차.jpg

쌍용자동차 문화제


뱃속에서 이미 투쟁을 경험한 아기


얼마 전에 아기를 낳았어요. 아기가 맞는 세상은 좀 더 나은 세상이면 좋겠단 생각을 많이 해요. 물론 제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힘이 있어서 잘 헤쳐 나갈 거 같긴 해요. 임신한 줄도 모르고 하이디스를 매각하고 먹튀한 대만 자본에 항의하러 원정 투쟁을 갔거든요. 대만에서 점거 농성할 때 배고프고 졸리고 그랬는데 애기 가져서 그런 줄은 몰랐지요. 한국에 와서도 하이디스 유가족하고 경기도 이천에 있는 회사 사장실에서 농성했어요. 한번은 뒤에서 쫓는 경찰이 저를 추월하는 걸 보고 ‘늙었나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임신이어서 그랬던 거였어요. 스스로 몸을 챙기는 거에 둔해요. 


원래는 아기를 낳는 건 제 처지에서는 사치라고 생각해서 아기 낳을 계획이 없었는데 임신이 됐어요. 나중에 임신인 걸 알고 남편이 “우리 아기가 대만에서 여러 점거 농성을 하고 이천에서 사장실 바닥에서도 잤네. 아기가 생명력이 강해서 안 떨어지고 붙들어서 다행이네.” 그랬어요. 마흔이 넘어서 임신을 해서 걱정했는데 아기가 건강해서 다행이고 고맙죠. 아기 이름이 세연이에요. 세상 세, 연대 연. 세상과 연대하라는 뜻이에요. 환경이나 국제 이런 세상을 둘러보고 연대할 줄 아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아기가 생기고 생활이 많이 바뀌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아기를 기르는지 정말 신기해요. 아기가 생기고 어쩔 수 없이 바뀌는 게 있어요. 원래는 에어컨도 없었는데 아기가 더워서 잠을 못 자니 샀어요. 국민건강보험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사보험을 거부하고 살았는데 아기를 위해서 실손보험에 들었어요. 돈도 많이 들고 삶의 방식도 조금 수정하고. 

육아 때문에 밤에 문화제나 집회를 거의 못 가서 동지들에게 미안해요. 아기한테도 일하느라 같이 많이 있지 못해서 미안하고. 그래도 활동을 계속 하는 건 열심히 활동하는 조합원들이 있기 때문인 거 같아요. 가끔은 이기적인 모습에 실망할 때도 있지만. 무엇보다 평범한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힘을 모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제게 여전히 있다고나 할까요. 워낙 어렸을 때부터 어려움과 고통을 많이 겪어서 어려움을 피하기보다는 의미를 추구하기도 하고요. 우리가 조금 고생하면 좀 달라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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