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열녀전 新烈女傳_비정규직 예술 노동자의 아내로 산다는 것

by 센터 posted Mar 07,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정현경 쉼표하나 7기 회원



사랑해서 결혼했다. 3개월 만에 결정하고 8개월째 되는 날 결혼식을 올렸다. 46세 새 신부와 54세 새 신랑의 첫 결혼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남편의 직업은 연극배우이다. 독립영화를 비롯하여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7~8년 전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하고 잠시 인기를 얻은 이력이 있다. 친한 지인들은 결혼에 대해 염려하고 만류했다. 염려와 만류의 주된 이유는 ‘경제력’이다. 그러나 나는 믿었다. ‘사랑은 자본을 뛰어넘는 거라고!’, ‘사랑으로 예술을 지키겠노라고!’ 결국 내 발등을 내가 찍었다. 


연극을 하고 받아온 첫 봉투에는 30만 원이 들어 있었다. 결혼 후 5개월이 지난 뒤였다. 3개월을 연습하고 7일을 공연한 34년차 중견 연극배우의 수입이다. 남편의 연극 후배들은 그보다 훨씬 적었다고 한다. 이럴 때는 지고지순한 태도로 ‘고생했다, 수고했다, 감사하다’라는 인사를 올리고 따순 밥을 차려내야 한다. 그러려고 했다. 신혼이니까. 그러나 난 내 감정에 충실했다. 지랄을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남편은 버텼다. 남편은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종편과 재연드라마는 하지 않는 것이다. 종편을 하지 않는 것은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시민으로서의 자존심이다. 재연 드라마를 하지 않는 것은 배우로서의 임계선이다. 그런 남편이 어느 날 재연 드라마를 하나 얻어(!)가지고 왔다. 내 지랄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의 입은 웃고 있으나 눈동자는 어둡고 탁했다. 통장을 확인했다. 내 명의 통장에는 두 달을 버틸 자금이 있었다. 한 남자로서 지켜왔던 원칙을 두 달간 유예시키기로 하였다. 재연 드라마를 취소했다. 잠시 아내로서 뿌듯했다. ‘난 역시 현모양처야.’ 결국 내 모습은 아니었다. 


텔레비전을 보면 화가 났다. 재미있는 드라마를 봐도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예능 프로를 봐도 웃기지 않는다. 그곳에 있어야 할 남편이 없기 때문이다. 남편은 뛰어난 배우이다. 희로애락의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에 독보적이다. 게다가 코믹하기까지 하다. 그런 남편을 캐스팅 하지 않은 텔레비전 속 모든 것들이 날 분노케 한다. 분노의 화살을 다시 남편에게 겨눈다. 적극적으로 찾아다니지 않는 태도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수많은 기획사, 캐스팅 디렉터에게 연락을 취하고 만나서 ‘요청’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남편의 프로필을 만들었다. 프로필을 쥐어주며 찾아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면 내 손으로 직접 우체통에 프로필을 넣었다. 우체국 영수증이 싱크대 선반에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스스로 뿌듯했다. ‘난 역시 외조의 여왕이야.’ 결국 남편을 내 손으로 상품화시키기에 혈안이 되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은 목감기를 달고 살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다.  나는 애가 탔다. 상품은 늘 건강해야 한다. 그래야 선택받을 기회가 와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남편이 극심한 몸살로 보름동안 앓아누웠다. 나는 발광하며 남편을 향해 ‘자기관리’라는 주제로 다시 한 번 가르치기 시작했다. 남편은 올해만 네 개의 연극작품을 했다. 다행히 몇 달은 아침드라마 단역으로 고정출연을 했고 타 방송사에 단발성 출연도 여섯 번 했다.  지역축제 사회를 2회 정도 했다. ‘단 두 줄로 가뿐하게 정리된 남편의 경제 활동’ 결과는··· 결국 나는 숨겨둔 실손보험을 해약했다.  


‘2017년 단 두 줄로 정리되는 경제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남편은 일 년 내내 대본을 손에 놓지 않는다. 매일 반복하며 읽고 쓰고 말하고 녹음하고 다시 암기하고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는다. 이 작업이 끝나면 작품과 인물에 몰입하기 위해 일상을 ‘배우’로 살면서 내재화 시킨다.  한 컷 출연을 위한 단 한 줄의 대사 역시 마찬가지다. 남편에게 예술은 이젠 실존이 아닌 삼시세끼 밥이 되었고 자존심이 아니라 생존이 되었다. 남편은 그렇게 세뇌되어 가고 있다. 역시 지랄발광이 효과가 있었다. 결국 나는 성공한 것인가? 


이렇게 남편을 세뇌시키고 훈련시키면 상황이 나아질까? 그래서 선택받기 좋은 상품이 되면 성공한 것인가? 과연 언제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에겐 끝이 있을까? 한 조사에 따르면 ‘예술 활동으로 연간 300만 원도 못 버는 예술가가 절반 이상이며, 응답자의 36.1퍼센트는 아예 예술 활동 수입이 전무하다’고 한다.1) 이 칼럼을 기준으로 하면 남편은 상위계층이다. 어쩌면 우리는 입 다물고 있어야 하는 부류이다. 어쨌든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모두가 피나는 노력을 한다 해도 한 명의 스타만이 존재할 뿐이다.  혹자는 말한다. 예술가는 배고파야 한다, 저 좋아서 하는 예술이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예술이다, 라고. 예술은 인간의 심신을 정화시킨다. 지향할 가치를 일깨워준다. 화폐경제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역할과 기여가 있다. 그럼에도 예술을 노동으로 생각지 않는다.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정규직, 비정규직의 개념도 없다. 예술가 스스로도 노동자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예술을 노동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없다. 예술인을 노동자로 보지 않으면 권리를 말할 수 없다. 내가 그랬다. 내가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남편을 끊임없이 훈련시키려 들고 생존력을 키워야 한다고 압박했다. 나는 둘 중 하나라고 믿었다. 남편의 상품성이 선택 받거나 남편이 바짝 말라 죽거나. 그러나 전자보다는 후자에 빨리 도달할 듯하다. 


나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사고의 방향을 바꾸었다. 다른 쪽을 돌아보니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길이 전혀 다른 방향의 하나’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한 놈만 패야 한다. 배우라는 개인과 남편이라는 역할이 무능한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치닫게 하는 사회구조가 잘못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쉴 사이 없이 예술을 하는 남편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것은 결국 남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 문제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또한 이것은 남편 개인의 문제가 아닌 예술을 하는 모든 노동자의 문제이기도 하다. 


얼마 전 남편 지인 장례식에 다녀왔다. 연극배우로 30년 열심히 일했지만 결국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시립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추위와 굶주림이 일상이었다는 고인을 추억하는 말들로 인해 내 가슴이 무너졌다. 30년 노동을 했음에도 노후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 결코 정당하지 않다. 예술은 노동이다. 예술가는 노동자다. 고로 아내인 내가 할 수 있는 지랄발광의 모든 에너지를 사회로 돌릴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신열녀新烈女이다. 


남편은 얼마 전 종편 드라마 섭외를 수락했다. 남편은 꿈이 있다. 예술이 노동이며, 예술가가 노동자임을 확산시키기 위해, 그래서 예술가로 살아갈 미래 세대들이 지금보다는 좀 더 노동자로 권리를 갖게 하고 싶다는 꿈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보다 더 ‘예술 노동자’로 사회에 인식시켜야 한다. 남편의 임계점이 개인의 생존에서 사회 변화로 확산된 순간이다. 


1) [중앙일보-삶의 향기] 가난한 예술가의 초상/ http://news.joins.com/article/22105098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