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민중과 자연에 대한 착취, 그리고 저항의 ‘그라운드 제로’ 아시오 광산

by 센터 posted Mar 0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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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직수 센터 정책연구위원



자본 축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착취’에 대해 우리가 쉽게 잊곤 하는 중요한 사실은 인간 노동력에 대한 착취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착취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근대 이후 일본에서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아시오 구리광산足尾銅山이다. 도쿄에서 멀지 않은 토치기현에 위치한 아시오 광산에서는 대규모 공해가 발생했으며, 혹독한 노동 착취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근대적 산업화 이후 최초로 반공해 운동과 노동자 폭동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아시오 광산 경험은 일본 내에서 본격적인 노동 운동과 안전보건 운동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미이케三池 탄광으로도 이어졌다.


아시오 광독과 야나카마을의 멸망


아시오에서 구리 광맥이 발견된 것은 1610년이었다. 이후에도 막부에 의해 간헐적으로 부분적인 채굴이 이루어졌으나 기술적인 한계 등으로 인해 채굴량은 제한적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인 1876년 재벌 후루카와 이치베古河市兵衛가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인 광산古河鉱業足尾鉱業所 개발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광산 인근에 건설된 제련소에서 배출된 황산화물 등 유독가스와 잔여물이 커다란 오염원이 되었다.

울창하던 숲이 가장 먼저 파괴되어 갔다. 광산 개발이 시작된 지 10여 년 뒤인 1885년부터 와타라세가와에서 물고기들이 대량 폐사하기 시작하였고, 2년 뒤에는 온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 이듬해인 1888년에는 와타라세가와 유역에 대홍수가 발생하여 주민들에게 광독鉱毒 피해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아시오는 관동평야 북쪽 끝자락 산지로서, 이곳에서 발원하는 강인 와타라세가와渡良瀬川는 유량이 풍부하고 주기적인 범람을 통해 평야지역을 비옥하게 해왔다. 그러나 광산 개발 이후, 옥토沃土를 만들어주던 강물은 독토毒土를 만들어냈다.


아시오 광독 사건은 ‘야나카마을谷中村의 멸망’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890년 광독 피해를 입고 있던 야나카마을 주민들은 광업소 측에 손해 배상 및 제련소 이전을 요구했고, 이듬해에는 지역 정치가인 다나카 쇼조田中正造가 제국의회에서 광업소 운영 중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광업소 측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1892년 주민들과 1차 합의금 계약을 맺었고, 2년 후 2차 합의금 계약 시에는 피해 보상 영구 해결 약속을 종용했다.

그러던 중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같은 해 정부와 광업소는 광독이 도쿄 쪽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와타라세가와渡良瀬川 합류지점을 기존 에도가와江戸川에서 토네가와利根川 쪽으로 변경하는 공사를 실시하였다. 주민 피해는 외면한 채 수도 도쿄를 보호하는 데 치중한 대응이었다. 이를 비웃듯 1896년 와타라세가와에서 또다시 발생한 홍수는 수도권 지역에까지 피해를 가져왔다. 1897년에는 정부에 의해 광독 예방 조치 명령이 내려졌는데, 이에 따라 이루어진 예방 공사는 폐수 배출로와 강 사이에 침전지(저수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한 번 와타라세가와 유역에 홍수가 발생하면서 침전지 둑이 터져 극심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당시 추산된 피해 농민 수는 약 1만 명이었다. 1900년에도 대규모 폐수 배출로 피해 농민이 1만 2천여 명에 이르렀으나, 정부는 피해 복구와 보상을 호소하는 농민들을 경찰력을 투입해 탄압했다. 1926년에도 와타라세가와의 대홍수로 광독 피해가 다시 발생했고, 이후로도 1950년대 말까지 거의 10년 주기로 홍수와 이로 인한 광독 피해가 반복되었다.


공해 문제 주민 운동과 다나카 쇼조


토치기현의 한 촌장 집안에서 태어난 다나카 쇼조는 초대 제국의회부터 10년간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1901년 다나카 쇼조는 마지막으로 제국의회에서 문제 해결을 호소한 뒤 의원직을 사직하였고, 천황에게 직소直訴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 여기서 지난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어느 참의원 의원이 원전 및 제염 노동자들의 방사능 노출 문제를 호소하기 위해 천황에게 직접 서한을 전달하였다가 커다란 비난에 휩싸인 일이 떠오른다. 그런데 다나카 쇼조 시대에는 일개 의원이 천황에게 직접 무언가를 호소하는 행위는 사형에까지 이를 수 있는 중죄였다. 그는 목숨을 걸고 직소하고자 하였으나 경호대에 저지당했다.

이듬해인 1902년 정부는 ‘멸망’ 직전의 야나카마을과 더불어 사이타마현의 2개 마을을 유수지로 지정하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사이타마현 마을들은 이 계획을 거부했다. 반면, 1903년부터 당시 4백50세대 2천 7백여 명이 살고 있던 야나카마을에서는 1903년부터 유수지화 계획이 추진되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다나카 쇼조는 야나카마을로 이주해 저항을 계속했다. 정부와 광업소는 수차례나 의도적으로 침전지 둑을 터뜨려 유수지를 침수시킴으로써 농성하며 저항하던 다나카 쇼조와 주민들을 쫓아내려 하기도 했다. 결국 1907년 강제 토지 수용이 시작되었다. 마을에 남아 삶의 터전을 지키던 수십 명의 주민들은 언덕에 가건물을 세우고 농성을 계속했다. 1913년 다나카 쇼조가 사망한 이후로도 일부 잔류 주민들은 농성을 계속했으나, 결국 1917년 모두 이주했고, 야나카마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다나카 쇼조는 당시 지식인으로서는 드물게 지역적 문제에 불과했던 아시오 광독 문제를 전국적 수준에서 보편적인 권리문제로 제기했다. ‘생명과 건강’에 대한 산업 자본과 국가의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공해 문제는 근대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부수적인 문제로서 치부되거나, 농업과 광업이라는 산업 간 이해 충돌 문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물론 당대의 세련된 근대적 지식인들과 달리, 여전히 전통적인 사회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한계는 있다. 그럼에도 다나카 쇼조는 당대 일본에서 정치 엘리트 및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실천했던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아시오 광산 노동자들의 폭동


메이지 유신을 전후로 출발한 일본의 산업 자본주의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이와 더불어 노동자 저항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00년 치안유지법 제정은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그럼에도 노동자 저항은 거세져 러일전쟁 이후인 1907년 정점을 찍었다. 한 해 동안 57건의 쟁의가 발생했고 6천여 명이 참여했는데, 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고 격렬했던 것이 바로 1907년 2월에 아시오 광산에서 1천여 명의 광산 노동자들이 일으킨 노동자 폭동이었다.

광산 노동자들의 불만은 특유의 하청제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조선후기 발달한 덕대제와 마찬가지로, 일본에는 함바飯場 제도가 있었다. 그렇다. ‘함바집’의 바로 그 함바다. 함바는 노동자들이 숙식을 해결하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본래적인 의미는 하청업체이다. 노동자들은 아시오 광업소가 아니라 수많은 함바에 고용되었고 함바의 두령으로부터 임금을 지급받았다. 당연히 중간착취가 횡행하였다. 이에 더해 러일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실질 임금은 저하한 상태였고, 임금 수준에 대한 불만도 상당했다.

함바에는 적게는 20여 명, 많게는 50여 명의 노동자들이 고용되었고, 여러 개의 반으로 나누어져 반장이 통솔하는 거소에서 생활하였다. 뿐만 아니라 광산에는 토모코友子라 불리는 직인조합 성격의 조직이 있어, 노동자들은 오야붕親分과 꼬붕子分의 수직적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주거비, 밥값, 일용품 등을 명목으로 많은 돈을 떼였고, 담배 등은 특히 비싼 값에 판매되었다.

한 번 갱내에 들어가면 길게는 24시간, 어떤 때엔 36시간에 이르는 작업을 하기도 하는 중노동이 계속되었다. 노동자들은 광독에 노출되는 것은 물론, 갱내 작업으로 인해 규폐까지 얻게 되는 등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이후 1946년 아시오 구리광산 노동조합은 전후 일본 최초로 광산 노동자들의 규폐 대책을 요구했으며, 이에 따라 1949년 아시오 인근의 닛코日光시에 국립규폐요양병원이 세워졌다.


관 주도-기업 주도 안전 보건 운동 기원으로서의 아시오 광산


오늘날 ‘안전제일安全第一’이라는 슬로건은 형해화된 혹은 관료주의적 안전 보건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안전제일’은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국내에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본디 안전제일은 ‘Safety First’의 일본어 번역어로, 1900년대 초반 미국의 US스틸 사장이었던 엘버트 게리(Elbert Henry Gary)가 불황 속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재해가 다발하자 사내 안전 운동 일환으로 제시한 슬로건이었다.

US스틸에 따르면 Safety First는 1912년 자사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표현이며, 게리 사장이 이를 슬로건으로 한 안전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고 한다. 요컨대 사측 주도의 생산성 향상 운동 일환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안전 운동’은 동시대 일본에 수입되었으며, 안전제일이라는 용어는 1917년 우신逓信차관이었던 우치다内田嘉吉에 의해 번역 도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제목의 안전 보건 지침서가 출판된 이후, 안전제일협회 설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안전제일’이라는 번역어가 등장하기에 앞서, 1913년 일본 내에서 최초로 기업 주도 안전 운동을 시작한 것이 바로 아시오 광산의 오다가와 마사유키小田川全之였다. 그 역시 미국 연수에서 접했던 Safety First를 번역하여 안전전일安全専一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1897년 정부 명령에 의해 광독 예방 공사를 담당했던 이가 바로 오다가와였다. 물론 아시오의 ‘안전전일’ 운동은 개별 기업 수준에서 이루어진 사례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안전전일 혹은 안전제일이라는 표어는 안전 보건에 대한 의식이나 실천이 거의 없었던 상태에서 관 주도-기업 주도의 ‘산업안전’ 운동 형성을 자극한 슬로건이 되었다.


아시오 광독 사건 역시 끝나지 않았다


아시오 광산은 근대 산업화와 청일전쟁, 러일전쟁으로 대표되는 전쟁의 시대를 배경으로 성장해왔다. 이곳에서 채굴된 구리는 대부분이 유럽 등 해외로 수출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부국강병’만을 내세우며 피해로 고통 받는 민중들을 외면하였다.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아시오 광산은 경제성을 잃어 더 이상 채굴을 할 수 없게 되었으나, 한국전쟁 특수와 고도 경제성장기를 맞으면서 수입 광석을 이용한 제련소 가동은 계속되다가 1973년에 이르러서야 아시오 구리광산은 완전 폐광되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축적된 중금속 등 유해물질은 최근까지도 유출 피해를 발생시키고 있으며 이로 인한 피해 역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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