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노동] 여성 노인 노동 이야기

by 센터 posted Mar 0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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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종 노년유니온 사무처장



내 나이 70으로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는 파견 노동자다. 젊었을 때는 남편과 조그만 가방공장을 운영했다. 공장보다는 가내 수공업이 더 맞는 말이다. 그땐 ‘사모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우쭐하기도 했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공장에는 열 명의 직원이 있었다. 기술자 한두 명을 빼고는 대부분 10대 중, 후반 아이들이었다. 집안 환경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했거나, 중학교를 마치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자식들에게 늘 이렇게 엄포를 놓았다. 

“공부 못하면 저 애들처럼 우리 집 같은 공장에서 일해야 되는 거야!” 

그 아이들이 이 얘기를 들었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내가 병원에서 파견 노동자로서 느끼는 소외감, 열등감과 비슷할 것 같다.

공장 운영은 어려웠다. 남편이 술과 도박으로 벌어들인 돈을 탕진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난 공장 아이들을 쥐어짰다. 점심시간이 12시부터 1시까지였지만 지키지 않았다. 밥이 덜됐다는 이유로 12시 30분이 돼서야 먹게 했다. 공장이 어려우니 조금이라도 일을 더 시키려고 일부러 그런 것이다. 끝마치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당시 근무 시간은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였다. 장시간 노동이었지만 제시간에 끝난 적이 없었다. 내가 일손을 놓지 않으니 공장 아이들이 손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정규직 청소 일을 하고 있는 지금 위치에서 보니 당시 공장 아이들에게 너무 했다 싶다. 늦었지만, 당시 공장 아이들에게 사과하고 싶다.

“얘들아, 미안하다. 내 욕심만 채웠구나. 용서해 다오. 잘 살아다오. 기도하마.”


파견 노동자가 되다


공장 아이들을 쥐어 짜가면서 일을했지만, 결국 공장은 문을 닫았다. 공장뿐 아니라 집도 날리고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남편은 정신을 차리지못하고 더 술과 도박의 수렁 속을 헤매었다.

뭐든지 해야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 등록금만큼은 대줘야 했다.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직업소개소를 통해 파출부 일을 얻었다.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14시간 일을 했지만 생활이 되지 않았다. 잠실야구장 청소를 병행했다. 야구 경기가 끝나거나 무슨 행사가 끝나면 청소를 하는 일이다. 야구가 늦게 끝나는날이거나 공연이 늦게 끝나는 날엔 새벽 5시가 돼야 일이 끝났다. 그러면 버스 안에서 잠시 눈을 부치고 7시까지 가서 파출부 일을 해야 했다. 일하고 있는 건지 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멍했다. 멍한 정신을 차리려고 커피믹스를 자주 마셨고 그래도 졸리면 믹스가루를 그냥 입에 털어 넣었다. 멍한 상태로 일을 하면서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난 죽는다. 나뿐 아니라 자식들까지도.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해야 한다고. 잘리지 않아야 한다고.


5.청소.JPG

잠실야구장에서 야구 경기가 끝난 후 청소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한겨레)


월급제 노동


파출부 일과 잠실운동장 청소는 일이 불안했다. 계속 있지 않았다. 덕분에 몸을 추스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몸을 추스른다는 것은 사치였다. 하지만 어찌해볼 도리가 없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오랜 일당제 생활 끝에 병원에 청소 일을 하는 파견 노동자 신분을 취득했다. 일당제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일당제 노동자가 아닌 월급제 노동자를 선호하는 이유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훨씬 편했다. 거기에 4대보험과 연차 휴가는 정말로 꿈같이 느껴졌다.

조금 여유를 찾았다 싶었는데, 짙은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큰아들이 학교를 졸업했는데도 취업이 안 된다. 공공근로, 노점상, 인턴사원을 전전한다. 가난이 세습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이 어미 뒤를 이어 자식이 비정규직, 일당제 노동을 하게 될 줄이야. 학교를 졸업해도 밥벌이가 어려울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나마 둘째와 셋째는 정규직으로 취업이 되어 안심이다. 하지만 얘들도 학자금 대출 받은 것 상환하느라 정신이 없다.


소망


큰아이 처지를 볼 때마다, 우리 집에서 일했던 공장 아이들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부려먹은 것에 대한 천벌을 큰아들이 받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우리 집에서 일했던 그 아이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혹여 일당제나 지금도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해도 생활하기가 퍽퍽하지 않는지, 큰아들 모습과 그 애들 모습이 겹치면서 눈물이 난다.

나야 죽을 날도 얼마 안 남아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 큰아들이나 비슷한 처지의 젊은 애들은 안정적인 일을 했으면 한다. 이 아이들에게 나와 같은 불안정한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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