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호석 형에게 드리는 글

by 센터 posted Jan 0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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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센터 기획편집위원



장례식.jpg


예나 지금이나 제게 ‘열사’라는 말은 입에 달라붙지 않습니다. 어색하고 딱딱하거든요. 고인이 삶을 스스로 내던지면서까지 얻어내려 했던 게 ‘열사’라는 두 글자일리는 만무하고요. 일면식도 없고 허락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양해해 주실 거라 믿고 전 당신을 형이라 부르겠습니다. 또래로서 존중의 마음을 담은 호칭입니다. 염호석 형.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근자 생활을 하며 접했던 비정규 노동 투쟁 사업장 중 유독 눈길이 더 가던 곳이 삼성전자서비스지회였습니다. ‘무노조 경영’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무소불위의 자본 권력 삼성에 맞서 분연히 들고 일어난 하청업체 서비스센터 노동자들. 관심을 넘어서 경외심마저 들 정도였죠. 언뜻 무모해 보이는 그 ‘깡’에 제 ‘깡’도 얹어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 영등포센터에 선전전을 하러 가기도 하고 조합원 분들과 술잔도 나누곤 했지요.


2014년 5월 18일 일요일. 전날 술을 들이부어 숙취가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가운데 습관처럼 들여다 본 페이스북에서 형의 부고 소식을 접했습니다. 술기운 탓이었을까요. 광주 시민들이 전두환 일당에 맞서 싸우다 산화해 간 5월 18일이라는 날짜와 지회의 투쟁이 승리하길 바라며 자신을 바친다는 유서를 남긴 형의 부고가 묘하게 화학 작용을 하더니만 저를 일으켜 세우더군요. 평소 같았으면 숙취 때문에 드러누워 꼼짝을 안 했을 텐데 말입니다.


조문을 하며 형의 얼굴을 처음 보았습니다. 행여나 잊을까 저어하여 절을 하고 나서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지요. 빈소의 분위기는 예상대로 상당히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묘했던 것이,  깊은 슬픔이 넓고 무겁게 깔린 가운데 알 수 없는 불안한 기운이 공존하더군요. 팽팽한 긴장 속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는 거 같았습니다. 


조문을 마치니 다시 숙취가 온 몸을 덮쳤습니다. 그 와중에 또 버릇처럼 소주를 깠어요. 센터 상근자 분들도 조문을 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술기운이 숙취를 몰아내기 시작할 무렵 빈소를 놀이터 삼아 뛰어다니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일행에게 저 아이가 누구냐고 물었지요. ‘별이’라더군요. 네. 형보다 앞서 세상을 등진 최종범 님의 딸 말입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당시 100일이 채 안 된 딸을 둔 아빠로서 별이가 너무 가엽더군요. 천진난만한 모습이 더 애잔하게 느껴졌습니다. 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를 남겨둔 채 항거의 수단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최종범 님의 고통은 또 어떠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습니다. 슬픔이 서서히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협력사’라는 허울 좋은 말로 착취의 구조를 은폐하는 삼성전자와 하청업체 사용주들. 또 그들을 비호하는 법과 권력.


담배를 피우러 1층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장면이 펼쳐지더군요. 어찌된 일인지 조합원들은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아버지!”를 외치며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조합원들 앞에는 노인들 몇몇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요. 혹시나 했습니다.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지회가 시신을 맡아달라는 형의 유지를 부친께서 거부하는 것일까. 앞선 정황을 모르니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하며 담배를 피우러 길가 쪽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 사이 노인들과 조합원들은 어디론가 가고 없더군요. 천천히 다시 발길을 돌려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려는데 이번엔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목도하였지요. 장례식장에 전경 중대가 쳐들어오고 이를 조합원들이 막고 있는 겁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습니다. 장례식장에 공권력 투입이라니요. 그것도 21세기 백주대낮에 말입니다. 대체 3개 중대나 되는 전경 병력이 무슨 이유로 이런 상식 이하의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일선으로 달려가 쳐들어오는 전경들을 몸으로 막으며 진압 목적을 밝히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하나, 둘, 셋, 밀어!”였습니다. 머리 위로는 채증을 위한 카메라들이 난무하고 아래로는 전경의 방패가 쉴 새 없이 밀고 들어오는 가운데 저는 전경들이 연행을 위해 일부러 낸 틈에 빠져 별다른 저항도 못 해 보고 연행되었습니다. 집회 자리에 나가 전경들과 부대껴 본 적은 몇 번 있어도 연행된 것은 처음이었지요. 


처음 연행되었고 전경들을 쳐들어오지 못하게 밀기만 했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음에도 저는 경찰의 다리를 가격하여 부상을 입히고 수사 받는 태도 또한 극히 불량한 ‘외부세력’이라는 이유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습니다. 덕분에 유치장에 조금 더 있으면서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분들과 깊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고 인간적 유대감을 끈끈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지요. 팔자에 없을 줄 알았던 법원 출입을 2년 가까이 하는 호사도 누렸고요.

2심까지 간 재판에서 전 벌금 400만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죄목은 특수공무집행방해(특공방)와 장례식 방해. 특공방은 그러려니 했지만 장례식 방해는 어이가 없더군요. 그곳에서는 모든 일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거라는 가정 하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정말 사실이라면 형은 그곳에서도 슬픔을 떨치지 못할 테니까요. 법이, 판례가 그러해서 유족의 뜻이 고인의 뜻보다 우선하기에 당시 공권력의 시신 탈취 작전은 합법이 되고 조합원들과 조문객들의 시신 수호 작전은 불법을 넘어 장례식을 ‘방해’한 무도하기 짝이 없는 행위로 전락하는 모순. 죽음으로 항거하며 남긴 유지조차도 간단히 무시해 버리는 공권력의 만행. 대체 형은, 그리고 저는 어떤 시대를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세상 많이 바뀌었어요. 상식을 철저하게 파괴해 온 여왕은 구치소에 있고 여왕을 농락하며 호가호위하던 자들이 징역형을 선고받아 깜빵 생활 중이죠. 그 와중에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문재인 씨가 정권 교체에 성공하여 한참 속도를 올리고 있는데, 초장부터 암초 투성이라 쉽지 않아 보입니다.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에 반대하고 인천공항공사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토론회장에서 정규직 직원들이 비정규직 직원들을 향해 야유를 퍼붓는 상황이 버젓이 연출됩니다. 정권 교체만으로 노동 문제의 질적인 전환을 이루어 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죠. 공공부문이 그러한데 민간 영역은 오죽하겠습니까. 얼마 전 한국GM 정규직 노조는 사 측의 인소싱(비정규직 노동자의 업무를 기존 정규직 노동자의 업무로 전환하는 것) 제안을 받아들여 비정규직 노동자를 배제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더군요.


최근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소식을 보니 지난 6월에는 삼성전자서비스 영등포센터에서 노조 활동을 앞장서 해 왔던 정찬희 대의원을 부당해고하여 노조 탄압을 노골화 하더니만 지난 10월 임금 교섭에서는 2018년 최저임금 인상분을 반영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뭐 언제는 정권에 기대어 싸워 왔습니까만 이놈의 재벌은 정말 눈 하나 깜빡 안 하는군요. 조합원이 아닌 제가 보아도 답답한데 현장에 계신 분들은 오죽할까 싶네요. 


형이 죽음으로써 항거했던 그해 6월 29일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삼성전자와 단체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76년간의 삼성 무노조 경영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것이죠.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뜁니다. 노동 현장의 필부들이 힘을 모아 재벌 권력 삼성의 반헌법적 질주를 막아냈다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역사적 흐름의 한가운데 형이 있었고, 최종범 님이 있었고, 슬픔을 싸움의 동력으로 전환해 나간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그 흐름 속에 함께하며 겪었던 일들은 제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생전 술 한 잔 나누지 못했지만 저는 형이 지독한 숙취를 함께 견뎌 온 사이처럼 느껴집니다. 

그곳에선 부디 평안하시길. 그리고 다시는 죽음으로써 항거하는 노동자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이승의 동지들을 보살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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