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절린드가 그랬어

by 센터 posted Jan 0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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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훈 쉼표하나 6기 회원



인류는 곧 멸망한다. 이미 전 세계에서 20억 명 이상이 사망했고 40억 명 이상이 죽어가고 있다. 망자를 거두어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하는 문화는 사라졌다. 거리마다 시체가 즐비하다. 아직 죽지 않은 모두가 종말을 직감한다.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에게도, 종말은 공평하게 찾아온다. 지구 위에 거대한 죽음이 내린다.


‘인류를 멸종시키는 방법’이라는 동영상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 동영상이 송출되던 순간에 시청자는 두 자리 수를 겨우 넘기고 있었다. 영상에서는 한 여성이 트로피카나 스파클링 망고맛 캔을 가리키며 이것을 마시고 자살하면 인류를 멸종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뚜껑을 따서 마시고 권총을 들어 머리에 총구를 대려는 순간 창문이 깨지며 고무탄이 날아와 그녀의 손을 맞춘다. 거의 동시에 경찰특공대가 들이닥쳐 그녀를 제압하고 카메라를 끄면서 영상이 끝난다. 유튜브 서버에 저장된 영상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곧바로 삭제되었지만 누군가 저장한 캡처 영상이 다시 유튜브와 SNS를 통해 유포되기 시작했다. 영상에 담긴 황당한 주장과 과격한 진압 장면이 만나 묘하게 흥미를 끄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캡처 영상 또한 올라오는 족족 삭제되는데도 캡처 영상을 저장했던 누군가에 의해 계속 다시 업로드되었다. 동영상이 지속적으로 삭제되는 정황 또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주장의 황당함과 별개로 망고 맛 트로피카나는 생산이 중단되고 시장에서 전량 회수되었다. 심지어 보건당국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특정 시기 이후로 망고 맛 트로피카나를 마신 적이 있는지를 조사했다. 자살을 방지해야 한다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고 자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감시하는 조치까지 시행되었다. 정부가 정말로 그 황당한 주장을 믿는 것인지, 어째서 믿는 것인지, 국민의 자살에 언제부터 그렇게 관심이 있었는지,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노원구 상계동에 사는 만년 취준생 박성호 씨가 자살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올해로 서른이 된 그는 몇 년째 취업에 실패하며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졌다. 올해도 실패하면 그냥 죽자고 결심했지만 그건 단지 죽을 각오로 노력한다는 마음이었다. 그랬던 것이 마지막 공채 시즌마저 별 소득 없이 끝나자 끝내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다. 세상을 원망하게 된 박성호 씨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동영상의 내용에 따라 트로피카나 캔을 따서 한 번에 마시고 집에서 목을 맸다. 그의 냉장고에는 오래전 사놓고 먹지 않은 해당 음료가 있었다. 


집주인이 밀린 월세를 받으려다 그의 집에 들어갔을 때 발견한 것은 온몸이 해체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의 시체였다. 경찰 신고를 통해 시신은 처리했지만 그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집주인 또한 시체가 되었다. 시일이 지나면서 상계동 전체가, 그리고 서울이, 그리고 경기도가 온통 시체 투성이가 되었다.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지가 떨어지고 살이 무너져 내려 피를 쏟고 내장을 토해내며 죽어갔다. 죽음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가 결국은 전 세계에서 20억 명이 사망하고 40억 명 이상이 죽어가는 상황이 되었다. 교통과 통신이 기능을 멈추기 전 인터넷을 통해 퍼진 소문에 따르면 이 전염병은 인간의 DNA에 간섭해 단백질의 결합을 막는 나노머신에 의한 것이었다. 


중국에서 개발하던 차세대 WMD가 연구 도중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원이 중단되고 개발자마저 행방불명되었는데 나노머신만이 민간에 유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의 작동을 중단시키는 방법은 있는지, 개발자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동영상을 올린 여성은 누구이며 나노머신의 유통 경로는 왜 하필 트로피카나 캔인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 채 종말을 맞고 말았다. 인류가 떠난 후 지구에는 전염병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동물들만이 남아 딸 수 없는 음료수 캔의 겉면만을 핥게 될 것이다.공영방송을 바로 세우기 위한 투쟁이 꼭 승리하리라 믿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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