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짓는 사람의 당당함으로

by 센터 posted Jan 0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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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날 농사짓는 사람



문명의 최첨단 이기利器가 인간의 갖가지 ‘욕망’을 추동하고 재생산하는 도구가 된지 오래다. 편리함과 여유를 좇아 이것들에 붙들려 왔건만 우리의 일상을 오히려 분주하고 복잡하게 몰고 가는 갖은 기기들로 인해 욕망이 아닌 ‘필요’에서부터 세상과 삶을 보는 관점을 우리는 빠르게 잃어가고 있다. 단순하고 검박하게 살지 못하게 된 이런 시대에 저마다 ‘오롯이’ 존재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진화하는 자본의 상징이 된 SNS 같은 첨단의 소통 방식에 기꺼이 사로잡힌 채 다양한 미디어 권력을 실어 나르는 기기들의 지배하에 놓이기 시작하면서 삶은 하릴없이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간다. 이속에서 고요히 자신을 대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제 손으로 지은 따순 밥 한 공기로 영혼의 허기까지 채워나가는 일이며, 꼭 가족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차린 정성과 온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더운 밥상 앞으로 불려가 여럿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일은 예전에 비해 또 얼마나 드문 일이 되어버렸는가.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차례대로 들라고 하면 여전히 대다수가 맨 앞자리에 ‘밥’을 놓을 것이고, ‘온전한’ 몸과 마음이란 기실 제대로 지어낸 밥 한 그릇으로 주림을 채우는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법일 텐데 말이다.


기껏 두어 번 본 적밖에 없는 그녀에게 밥상을 차려주고 싶었다. ‘요리’라고 부를 만한 특별한 음식이 놓인 밥상이 아닌, 이전부터(혹은 예전에는) 많은 이가 일상적으로 먹어왔음직한 간소한 밥상을 말이다. 두어 가지 잡곡을 섞어 밥을 지어 그릇에 담고, 김치, 달걀찜, 콩나물무침, 마늘종장아찌, 구운 김으로 상을 차렸다. 가까이 살지도 않고,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건만 밥상을 사이에 두고 함께 수저를 드는 동안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인 듯 살가움이 일었다. 그녀가 ‘그저 그럴지도 모르는’ 밥과 반찬이 놓인 상을 참 소중하게 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 왔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밥을 나누고 난 후 얘기를 들었다. 


1980년대 말, 그녀는 서울 성수동에 있는 한 다국적 기업의 생산라인에서 검수를 담당하는 노동자였다(이곳에서 5~6년을 일했다). 전국에서 파업이 들불처럼 일던 그때, 그녀는 어렸고, 그래서 몰랐다. 파업이 자신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의사를 표현할 최선의 수단이자 무기임을. 파업하는 동료들을 피해 다녔다. 언젠가부터 그때의 미안함이 부채감으로 남아 잔상처럼 계속 그녀 안팎을 서성거렸다. 


20대 중반 무렵, 직장을 그만두고 디자인 공부를 하러 가기 위해 탄 일본행 비행기에서 인연을 만나 결혼하면서 남편의 고향인 남도의 한 시골마을로 왔다. 함께 농사지으며 아이 셋을 낳고 길렀다. 젊은 사람들이 흔치 않고 가부장적인 문화가 강한 데다 시집온 여성의 처지라 더 더욱 소통할 이가 드문 농촌공동체에 적응해 살아가려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여가면서 우울증이 찾아왔다. 가까이에서 오가며 맘 터놓고 얘기 나눌 친구 하나 없이 육아와 가사와 ‘돈 안 되고 고되기만 한’ 농사를 병행하는 가운데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8년 전, 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학교 급식조리사로 취업을 하면서 숨구멍을 틔울 수 있었다. 농촌에서 감당해야 하는 집 안팎의 온갖 일에 채이다가 읍내의 학교로 출근할 때면 차라리 “쉬러 나오는” 기분마저 들었다. 조리사 일은 “생소하지 않으면서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 현재 근무 중인 중학교는 급식 조리사로 일하게 된 두 번째 직장으로, 처음 일했던 학교에서 1년 동안 근무하다가 이곳으로 옮겨와서 7년째 다니고 있다.


그러니까, 그녀는 ‘밥 짓는 일’이 직업인 사람이다. 학교에서는 ‘급식 선생님’으로 불린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근 시간인 8시가 되기 전에 일터인 학교에 도착해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음식을 장만하기 시작한다. 재료들이 주문 수량에 맞춰 신선한 상태로 왔는지 살핀 후에 다듬고 씻고 썰고 삶거나 데친다. 조리 전처리에 해당하는 이 과정을 마치게 되면 밥을 하고, 본격적인 조리에 들어간다. 아이들과 다른 교직원들의 식사 시간인 12시가 되기 전에 음식 상태도 점검할 겸 동료들과 먼저 식사를 한다. 밥 먹을 시간이 따로 없으므로 30분가량 되는 이 시간이 점심식사 시간이 된다. 조리원 선생님 세 사람, 영양사 선생님 한 사람에 조리사인 자신까지 포함해서 다섯 사람이 이렇게 매일 300명분의 식사를 준비한다. 학교 급식 규정에 따르면 급식팀원 책정은 식사 인원 400명을 기준으로 하는데, 조리사 한 명, 영양사 한 명 외 식사 인원이 400명 이상이면 150명 당 조리원 1명, 이하면 100명당 1명이 맡도록 되어 있다. 식사는 3학년, 2학년, 1학년 차례로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섞이어 하는데, 1시 20분쯤까지 이어진다. 식사 시간이 마무리되면 남은 음식물을 정리한 후 2시간가량 한바탕 설거지와 청소를 한다. 다음 날 메뉴를 점검하고 ‘유해 요소 안전관리 기준’ 관련 일지를 작성한 후 4시경 퇴근한다.


아름답고 어질게 살아가라고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미인’)값을 하며 살아야지!”라고 다짐하곤 한다는 그녀는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전남지부 장흥지회 지회장직을 4년째 맡고 있다. 2010년에 출범한 전국학비노조 조합원은 전체 학교비정규직 35만여 명 가운데 5만여 명. 전남지역은 5천 3백 명이고, 이 중 장흥지역 조합원은 160명가량으로 조직률 90퍼센트에 다다른다. 그녀가 속해 있는 조리 직군은 학교비정규직 62개 직군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직군으로, 20여 년 전부터 있었다.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하지만 임금은 그들의 절반 정도밖에 못 받는 학교비정규직의 90퍼센트 이상이 여성이고, 조리 직군은 여성의 비율이 95퍼센트에 달한다. 그리고 조리 직군 종사자들 가운데 40퍼센트 정도가 농사를 짓거나 식당이나 반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다른 일을 병행하고 있다. 학교에서 비정규직을 채용할 때 적용 규정이 되는 ‘취업규칙’에 “학생 수나 학급 수가 줄면 이에 맞춰 비정규직을 해고할 수 있다”는 독소 조항으로 인해 고용 불안이 심하고, 방학 기간에는 임금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 60세인 정년 때까지 그녀 역시 조리사 일을 계속하고 싶다. 무기 계약직이기는 하나, 농촌 지역이라 소규모 학교가 많다 보니 도시에 비해 학생 수가 줄어들 여지가 많아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 고용이 보장되고, 적어도 정규직 임금의 80퍼센트 가량은 받을 수 있으며, 준공무원 수준으로 처우가 개선되는 ‘교육 공무직’으로의 조정 요구가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의 핵심적인 요구사항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여름, 학교비정규직 총파업이 있었을 때 ‘밥하는 아줌마가 왜 정규직화 되어야 하나’라는 한 국회의원의 ‘막말’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명과 기술과 자본의 힘을 절대시하면서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조직하는 데 있어 오래전부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온 밥이며 밥 짓는 행위를 모독하고 비하했다는 점에서 발언자는 자신의 저열한 인식 수준과 무지를 몹시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다시 밥/짓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하루하루 쑥쑥 커가는 아이들에게 긴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그녀가 지은 밥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 어른이 된 아이들은 삶의 난관을 만나게 되더라도 성장기에 먹었던 그 따스한 밥의 힘을 동력 삼아 잘 헤쳐 나갈 것이다. 먼 미래일지 가까운 미래일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영혼을 잠식한 온갖 문명의 이기들로 인해 지금보다 더 삶이 공허해져버렸을 때 더욱 빛을 발할, 진정 강한 이들은 아이들의 현재며 인류의 미래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밥을 짓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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