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고 싶지 않은 끈 노조! ‘연대’가 아니라 ‘함께’_박호준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방송 비정규직 티브로드지부 교육연대부장 1

by 센터 posted Jan 0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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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2017년 11월 18일 토요일 오후,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사무실에서 박호준 부장을 만났다. “2014년 겨울인가 광화문에서 만난 적 있어요.” 인사를 건넸더니 “저도 여러 번 본 적 있습니다”했다. 더듬어 보니 그해 겨울 티브로드 비정규직노조가 흥국생명 빌딩에서 노숙 투쟁할 때였고, 또 다른 투쟁 현장에서도 그이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센터 상근활동가들은 그를 ‘연대의 화신’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연대한다고 하지 않고 함께한다’고 한단다. “함께한다.” 왠지 가슴 따듯해지는 좋은 말이다. 그렇게 두 시간 반 동안 어릴 적 가족 얘기부터 퇴학당한 학창시절, 케이블방송 들어간 사연, 노조 만들어 투쟁하는 이야기까지 그이만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거리는 뚝 떨어진 기온에 찬바람까지 불어 겨울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훈훈했다. 이번 겨울에도 그는 투쟁 현장 어디에선가 발그레한 볼에 입김 호호 불며 당당히 서있을 거다. 끈을 놓지 않기 위해, 함께하기 위해. 

인터뷰·정리 : 이응덕 쉼표하나 2기 회원


도입사진(박호준).JPG


“연대가 아니라 함께다. 투쟁 현장에는 언제나 내가 있다.” 안녕하세요.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방송 비정규직 티브로드지부 교육연대부장 박호준입니다. 《비정규노동》을 통해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티브로드노조를 간단히 소개드리면 전국 1,600명 설치·수리 기사가 근무하고 노조원은 현재 150명 정도 됩니다. 2013년 3월 노조를 설립했는데 처음 70~80명으로 시작해 그해 5월 180명, 2013년 투쟁 승리하고 나서는 400명까지 늘었어요. 그러다 2014년 4개월간 전면파업 노숙투쟁하면서 힘든 사람들이 탈퇴해서 절반까지 줄었어요. 올해(2017년) 2월에서 5월까지 미조직 센터 선전전을 엄청 다녔고 200명까지 늘리는 걸 목표로 하고 있고요. 저희는 지난 9월 15일부터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2년마다 하는 원청과 협력업체(센터) 재계약 때 전원 고용승계 보장을 요구하고 있어요.


“평생 직장보다 평생 직업이 필요하다.”


제가 케이블방송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건 1996년입니다. 그해 12월 26일 ‘의왕 유선방송’이라는 회사에 첫 출근을 했어요. 면접 볼 때 “여기 왜 다니려고 하냐”고 물어서 “평생직장보다  평생직업이 필요하다. 배워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1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는 거예요. 딴 데 알아봐야 하나 하던 중에 연락이 왔어요. 출근하라고.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니까 진짜 열심히 일했죠. 한두 달인가 지나 당시 부장이 얘기하더라고요. 제가 입사할 때 면접자가 네 명이었는데 세 명이 일주일 사이에 하루 나오고 안 나오고 이틀 나오고는 안 나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저를 불렀대요. 그런데 말 그대로 제가 ‘흙속의 진주’가 된 거죠.(웃음)


입사하고 6개월 만에 주임을 달았어요. 보통 3년 걸리는데 초고속 승진을 한 셈이죠. 그때 사무실에 기사가 여덟 명이었는데 부장과 저 빼고 아무도 운전면허가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회사 차에 장비 싣고 다니면서 운전을 했죠. 그러면서 최고참이던 부장을 따라 다니면서 일을 빨리 배울 수 있었어요. 기술도 하루가 다르게 늘었고요. 당시 경기도 평촌 신도시 지역 선로 설치가 한창이었는데 가로등에 4단짜리 사다리를 가지고 가야 돼요. 하루에 2~3킬로미터를 사다리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어요. 그때는 전봇대 오를 때 사다리 놓고 올라가면 눈치 받았어요. 일 못한다고. 밧줄 하나 매고 휘청휘청 하면서도 잘 올라갔어요.


회사차 가지고 출퇴근하지, 차에 장비 다 실려 있지 하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거의 제가 가는 거예요. 험한 일 궂은 일 도맡아 했지요. 제가 눈치가 빨라요. 일할 때 일머리가 있다고 하잖아요. 제가 그랬거든요. 지금 판교에서 식당하는 당시 부장도 인정했어요. 그런데 제가 빨리 승진하다보니 직장 동료들 시기, 질투가 장난이 아니에요. 결국 선배들 세 명이 한꺼번에 반란을 일으켰어요. “어떻게 쟤랑 같이 주임을 다냐. 우리보다 짬밥이 한참 낮은데.” 그러면서 다 그만둔 거예요. 결국 일주일 만에 다시 오더라고요. 그때 유선방송 기사들이 아침에 작업 지시서 들고 나가 일 마치면 바로 사무실 들어와야 하는데 안 그랬어요. 한 군데 하고 나면 안 들어오고 당구장이나 노름방 같은 데 간 거죠. 그때는 동네마다 그런 데가 있었는데 저는 안 그랬어요. 자랑이 아니라 제가 성실했어요. 그때 안양에만 열두 개 유선 방송사가 있었는데 지금은 통합돼서 두 개 뿐이에요.


뿔뿔이 흩어진 가족, 그리고 퇴학


이제 어릴 적 이야기를 드려야겠네요. 저는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의장대에서 근무한 군인이셨는데 장남이셨어요. 할아버지가 고향 와서 농사지으라 하고 제대시켰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나는 서울 사람인데 어째 농사를 짓냐.” 하고 논 팔아서 사업하다 망했어요. 사기를 당한 거죠. 그리고 술에 찌들어 살면서 폭력적으로 변했어요. 집에 있는 거 다 부수고. 결국 엄마는 아버지 폭력에 못 이겨 못 살겠다 하면서 집을 나가셨죠. 동생 둘 데리고. 아버지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말에 돌아가셨어요. 저는 혼자서 외갓집에 의탁해서 살았죠. 되는 데까지 학교 다녀라 하고. 그때 동생들도 있고 저까지 하면 엄마 혼자서 빠듯한데 살림이 안되었죠.


학교 다니면서 선생님의 부조리함을 참지 못했어요. 외갓집에서 살다보니 돈도 없고, 옷도 그렇고. 특히 머리가 길었어요. 두 달 정도 지났는데 담임선생이 매일 불러서 출석부로 머리를 때리는 거예요. 머리 깎으라고. 왜 그런 선생 있잖아요. 잘 사는 집 애들은 봐주고 못 사는 집애들은 무시하고. 그래서 제가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어요. 그러고 “학교 안 다녀.”소리 지르고 나왔어요. 그렇게 학교 나와서울 간다고 횡성에서 원주까지 무작정 걸었어요. 가면서 토큰(token)하고 회수권을 많이 주웠어요. 원주터미널에서 청량리 가는 버스 좀 알려달라고 하는데 경찰이 오더라고요. 가출 청소년이라고 신고가 들어갔겠죠. 그렇게 경찰한테 인도돼서 다시 외갓집에 돌아갔어요. 그때 외할머니가 “니가 정 그러면 나도 책임 못 진다. 엄마한테 가라.” 그러셨어요. 그렇게 중1 때 선생님하고 싸우고 퇴학 당하고 안양으로 쫓겨 왔어요. 저는 3남 3녀 중에 넷째에요. 큰형도 어렸을 때 가출했고, 큰누나는 기숙학교 갔고, 작은누나도 딴 집으로 양녀로 들어갔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거지요.


안양으로 올라와 전학 신청서를 넣었더니 퇴학생은 전학이 안 된다고 했어요. 내년에 신입생으로 들어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알아보니 무슨 야간학교가 있더라고요. 안양 제일실업중고등학교로 편입이 가능했어요. 그리고 마침 중3 때 그 학교가 문화공보부 학력 인정 학교가 돼서 검정고시를 안 봐도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어요. 운이 좋았던 거죠. 저 중1, 2 때는 공부 잘했어요. 1, 2등 했으니까. 그러다 3학년 때부터 망가졌어요. 그 학교엔 다 저하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들이 온 거에요. 그렇게 고등학교에서 좋은(?) 친구들 만나 밤거리 많이 쏘다녔어요. 술 담배도 많이 하고.(웃음)


감옥생활, 인생이 달라지다 


당시 안양에 큰 폭력조직 두 개가 있었는데 제가 한쪽에 속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양쪽 조직에 있던 어린 고등학생들끼리 큰 싸움이 벌어진 거예요. 오십 명이 넘는 애들이 패싸움을 벌인 거죠. 그때 세 명이 크게 다쳐서 방송 뉴스에도 나왔어요. 제가 주범으로 몰려 단기 1년 6개월, 장기 2년을 선고 받았어요. 천안교도소에서 2년 실형을 살았지요.


그런데 거기서 제 인생이 확 달라졌어요. 수원교도소에서 1심 재판 받을 때 방에 ‘봉사원’(소년수들만 있는 감방에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같이 수감하는 것)이라고 해서 대학생들이 있었어요. 그곳에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 총학생회장이 있었어요. 그 형이 최현수라고 지금 안산 ‘자바르떼’라는 예술인 공동체에서 일하는데 지금까지 저와 동지로, 형 동생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2013년 노조 만들 때 안산에서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집시법(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감옥 들어와서 저와 처음 만난 거지요. 그때가 1988년인가 89년인가 그랬어요. 교도소 안에서도 학생 운동권하고 조폭은 상생相生을 해요. 일반 재소자들이 운동권들 못 건드리게 조폭들이 막아줘요. 똑똑하잖아요. 그러면 운동권 학생들은 교도소 안에서 불합리하거나 뭐 그런 것들을 얘기해서 조폭들을 또 막아주죠. 먼저 감방 들어온 조폭 선배들도 저를 막내라고 챙겨주고 그랬어요.


그 형이 책을 한 권 줬는데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어요. 그리고 매일 저녁마다 ‘소리방송’이라는 걸 해요. 그게 뭐냐 하면 감옥 철문에다 입 대고 “자 지금부터 소리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철문을 차고 막 박수를 쳐요. 저도 밑에서 발로 철문 차고 그랬어요. 그러면 사회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가 교도소에서 어떤 불합리한 일을 당하고 있는지, 정권이 어떻게 나쁜 짓을 하고 있는지 매일 저녁마다 설명해주는 거예요. 당시 운동권들이 하도 많이 잡혀 와서 각 층마다 방송을 했어요. 그러다 저는 천안교도소로 옮겨 2년을 살았어요. 

감옥에서 나온 후에 다시 조직에 들어갔는데 두 달인가 있다가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봐.’ 하고 나왔어요. 그 사이 고등학교도 자동으로 퇴학을 당했지요.


현장.jpg

투쟁 현장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박호준 교육연대부장.


이 일 저 일, 내 길을 찾기까지


지금 안산에서 중국집하는 제 친구 놈이 있는데요. 그때 우리 또래들이 또 사고를 쳐서 열다섯 명이 청주로 도망을 갔어요. 그렇게 1년 반 정도 중국집에서 먹고 자며 숨어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때 배달하고 음식 만드는 것도 배우고. 그러다 잠잠해져 다시 안양으로 올라왔어요. 다시 중국집에 취직할까 하다가 그동안 돈을 조금 모은 게 있어 친구하고 봉고차 사서 남대문 시장에서 500원, 1000원짜리 옷 사서 시골 돌아다니면서 팔았어요. 핸드 마이크 들고 옷 판다고 방송하면 동네 사람들이 나와요. 시골 분들이 읍내 나갈 시간도 안 되고 또 싸기도 하고. 그렇게 500원에 떼다가 1500원, 2000원에 파는 거예요. 장사가 꽤 잘 됐어요. 그러자 아는 친구들하고 동생들이 자기들도 해보겠다고 찾아와서 먹이고 재우고 하니 남는 게 없는 거죠. 그렇게 한 6개월 하다가 접었어요. 이곳도 역시 우리 길이 아닌가봐 했죠.


그 다음에는 제일제당 비트 대리점 영업사원으로 들어갔어요. ‘때가 쏙 비트~’ 라고 당시 인기 있던 세탁 세제인데 그걸 구멍가게에 팔러 다닌 거예요. 그것도 한 6개월 했나. 제일제당 원청 대리가 맨날 와서 시비를 걸어요. 요즘 말로 영업 압박이죠. 제가 그 회사 직원도 아닌데 저한테 지랄하고 대리점장한테도 지랄하고. 하루는 대리점장이 “(제일제당) 손님 왔으니까 니가 가서 대접하고 영수증 가져와라.” 하면서 카드를 주더라고요. 알았어요 하고 단란주점에 갔죠. 그런데 거기서도 또 ‘갑질’을 하는 거예요. 화가 나서 두들겨 팼죠. 제 기질이 어디 가요.(웃음) 저는 원래 안 건드리면 가만히 있어요. 부당한 걸 못 참는 거지. 다음날 대리점 가서 사표 냈어요.


그리고 친구 놈하고 집에서 텔레비전 보다가 유선방송 회사에 들어가게 됐어요. 이게 제 적성에 딱 맞는 거예요. 뭐 만지고 고치고 막 돌아다니고 하는 게. 어차피중국집도 배달하면서 돌아다니고 옷 파는것도 그렇고. 제일제당도 돌아다니는 일을 해서. 제가 공장에서 일할 체질은 아니었어요. 사실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녀 주판 두드리고 이런 거만 배웠지 기술은 전혀 몰랐죠. 그런데 그때는 초보자 모아서선배가 일대 일로 직접 가르치는 방식이니까. 그걸 도제방식이라고 해요. 그렇게 일을 배운 거죠.


2000년, 노동조합 만들려다 실패


김대중 정부 때 케이블방송을 하나로 합치기 시작했어요. 1998년 태광그룹에서 안양 지역 모든 유선방송을 합쳐 ‘ABC 안양방송’이라는 회사를 만들었어요. 그때까지는 정직원이었는데 그 후로 임금과 노동 조건 등 대우가 점점 나빠졌죠. 기존 방식에서 대기업 방식으로 바꿔버리면서 원청에서 내려온 사람들과 차별을 두기 시작했어요. 그걸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2000년에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했죠. 나이 서른도 안 되는 젊은 사람들 40~50명이 모여 민주노총에도 물어보고 해서 시청에 설립 신고를 했어요. 허가제니까 서류 심사에서 통과하면 되는 거였고. 그런데 위원장, 사무국장, 집행위원장 세 명이 3일째 되는 날 서류를 반려하고는 회사하고 노사협의회를 따로 만든 거예요. 우리는 허가서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말하자면 어용 노조를 만든 거죠. 그러면서 노조 만들려고 활동한 사람들 다 자르고 후속 조치로 자회사를 만들어서 우리를 다 그쪽에 쓸어 넣었어요. 그게 첫 번째 구조조정이었죠. 자회사 이름이 ‘시스넷 코리아’였는데 당시 대만에서 가장 잘 나가는 회사 이름에다 그냥 코리아라는 이름만 의미 없이 갖다 붙인 거예요. 그 사람들 그런 거 잘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해고되고 정직 당했어요. 저도 주동자 중에 한 명으로 해고는 안 시켰는데 대신 3년 정도 ‘왕따’를 당하면서 회사 생활했어요. 같이 근무하는 사람들이 밥도 같이 안 먹어주고 술도 안 마셔주고. 또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게 당시 애들(회사 후배들)이 당구장이나 PC방 가면 “이렇게 하지마라. 너희한테 안 좋다. 회사에 걸리면 해고 사유가 된다”고 제가 따라다니면서 말렸거든요. 그런데 회사는 기사들이 어디서 뭐 하고 누구랑 몇 시까지 있는지를 다 아는 거야. 애들이 생각할 때는 제가 쫓아다니면서 그런 거 하지마라 하니까 제가 회사에 일러바친 것으로 오해를 한 거죠. 그게 상황이 역전된 게 하루는 회식을 하는데 사장이 그날따라 안 먹던 맥주를 한잔 먹더라고요. 알딸딸하게 기분이 좋아졌는지 갑자기 “야 김OO 과장하고 윤OO 과장 일로 와. 잘하고 있어. 지금처럼만 하면 돼.”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저게 뭐지? 잘하고 있어? 뭐지? 혹시···.” 했죠.


다음 날 제가 둘을 추궁했어요. 그때 다 같은 과장이었는데 “형네가 애들 뒷조사해서 회사한테 얘기했냐?” 하니까 아니라고 부인하는 거예요. 그때 그 밑에 똘마니가 하나 있는데 제가 그 놈도 다그쳤거든요. 결국 그놈이 실토를 하더라고요. 자기가 적어서 형들한테 갖다 주면 형들이 사장한테 보고했다고. 그걸 사장이 다른 직원들이 보는 회식자리에서 스스로 밝힌 거죠. 그때 제가 후배들한테 그랬어요. “다른 사람들은 안 믿어도 너네는 나를 믿어야지.” 그러니까 동생들은 “우리는 그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밥 먹다가 판을 엎으면서 “아니라니까.” 하고 소리 지르기도 하고 그랬어요. 아무튼 그렇게 하면서 직원들과 오해가 풀리고 다시 관계가 좋아지게 되었죠. 관계가 좋아지니까 일도 잘 되고 팀장까지 하게 됐어요.(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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