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부츠

by 센터 posted Oct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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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하 쉼표하나 2기 회원



동생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레인부츠가 있었다. 신을 기회가 여러 해 동안 몇 번 밖에 오지 않아 신발장에 나 몰라라 방치해 놓은 상태였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천둥 번개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무서운 장마는 내가 있는 지역만 조용히 비켜간 듯했다. 덜컹거리는 창문의 흔들림만 몇 차례 있었을 뿐. 


집이나 도로가 침수 피해를 당하지 않아 다행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몇 년째 코딱지만한 신발장 꼭대기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남색 레인부츠를 보면 가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걸 가져다 버려? 신을 날도 별로 없는데’ 하다가도 동생의 성의와 비 오는 날 움푹 파인 웅덩이를 첨벙거리며 걷는 상상을 하면 쉽게 버리질 못하겠는 거다. 


올해 초 가뭄이 한반도를 휩쓸어 농민들의 시름이 그야말로 정점을 치솟을 무렵이었다. 야~~ 드디어 장마다! 모두가 고대하던 장마가 시작되었다. 해갈도 해갈이지만 이제 레인부츠 위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자연스럽게 씻을 수 있겠다 싶어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엊그제 장마 예보가 나왔는가 싶더니 마침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앗싸~!’

온 세상을 몽땅 쓸어버릴 듯 세차게 쏟아지는 비, 종아리까지 올라온 레인부츠에 사정없이 마구 튀는 빗방울, 그리고 비를 맞으며 물웅덩이를 참방참방 거리며 걷고 있는 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상상만 해도 시원하고 짜릿했다. 오로지 올해는 레인부츠를 꼭 신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나의 출근 준비는 평소보다 빨라졌다. 그러나 이런 해맑은(?) 상상은 그야말로 현실이 아닌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점점 되어갔다. 


이미 내리고 있는 비는 기대해 마지않던 ‘휘몰아치는 거센 폭풍우’가 아닌 ‘고요히 내리는 이슬비’로 잦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록 ‘구라청’이라 불리는 기상청의 일기예보를 오늘만 믿어보기로 하고 과감히 레인부츠를 신고 집을 나섰다. 거리에는 나 말고 레인부츠를 신은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길을 건너려고 집 앞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섰다. 같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곁눈으로 나의 다리를 흘낏흘낏 쳐다봤다. 초원이의 백만 불짜리 다리도 아닌 장화 신은 코끼리 다리를 자꾸만 쳐다보는 시선들이 자꾸만 신경 쓰여 살짝 우산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늘 저녁엔 비가 엄청 쏟아질 거야. 아니 꼭 쏟아져야만 해.’

다시 한번 기상청의 일기예보가 맞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신호가 바뀌자마자 냅다 뛰어갔다. 한 손엔 에코백을 다른 한 손엔 큰 우산을 들고, 무거운 레인부츠를 신고 뒤뚱뒤뚱 뛰는 폼이라니,참···.


온종일 비가 오락가락하기를 반복하더니만 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 됐다. 창밖을 보니 하늘도 참 무심하게시리 비는 아주 산뜻하게 그쳐 있었다. 그나마 아침에 내리던 이슬비조차도 그 시간엔 내리지 않았다. 밀려있던 일도 처리할 겸 야근이나 한번 해볼까 잠시 고민을 하다 그 얄팍한 속내가 부끄러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찝찝한 마음을 뒤로 하고 사무실 밖을 나왔다. 겨울이면 벌써 어두컴컴해졌어야 할 하늘은 전신주에 붙은 유인물의 글씨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밝고 환했다. 

‘이 눔의 밖은 오늘따라 왜 이리 더 밝은 거야. 레인부츠는 괜히 신고 나와서. 어이구···.’ 

평소보다 밝은 바깥 풍경에 괜한 심술이 나서 애꿎은 땅바닥을 우산으로 탁 쳤다. 레인부츠에 장대 같은 긴 우산을 들고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가는 중, 역시나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 쭈뼛쭈뼛 온몸으로 그 시선을 다 받으며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갑자기 머릿속 기억 버튼이 재생되면서 스멀스멀 올라온 웃음이 빵하고 터져 나왔다. 오늘따라 나름 깔 맞춤을 한다고 레인부츠 색과 같은 남색 멜빵 치마를 입고 나왔다. 아침엔 몰랐는데 그 멜빵 치마가 왠지 앞치마 필(feel)이 나는 것이 이대로 수산시장에 가서 뜰채로 펄떡대는 생선 한 마리라도 잡아야 할 것만 같은 영락없는 현지 상인의 모습이었다.


비 오는 날, 멋진 레인부츠를 신고 물웅덩이를 신나게 걸으리라 생각했던 하루가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수산시장 상인의 모습으로 민망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내 다시는 레인부츠 따위는 신지 않으리.’ 

쉼표하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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