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운동, 오롯이 그 길 위에서_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김주환 정책실장 1

by 센터 posted Jul 0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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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몇 시간 동안의 만남으로 한 사람의 삶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그것도 자신을 드러내기 조심스러워하는 이의 이야기는 더더욱 그렇다. 김주환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정책실장은 특히 그러했다. 결국 한 번의 인터뷰로는 부족했다. 두 차례의 만남 끝에야 운동에 대한 그이의 고민과 삶의 흔적을 꿰맞출 수 있었다. 잘난 척, 잘 살아온 척 느껴질까 한마디 한마디 조심스럽게 전하는 김주환 정책실장. 그이의 지난 삶을 좇아가다보면 티내려 하지 않아도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주류 속에 끼지 않은 학생운동부터 인천 노동 현장 활동, 화학섬유연맹을 통합하고 이랜드, 한국통신 투쟁 등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는 항상 김주환 정책실장이 있었다. 짧은 지면 속에 수십 년의 시간을 담기엔 부족해 두 차례에 나눠 담는다.         

인터뷰·정리 : 진기훈 쉼표하나 6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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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형은 학생 운동, 부모님은 민가협 활동


저는 서울의 전형적인 서민 집안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친척집에서 많이 살았어요. 당시 부모님은 응암동에서 세탁소를하셨는데 잘 안 돼서 문을 닫고 중곡동을거쳐 구리까지 단칸방을 전전하면서 이사를 다녔죠. 아버지는 건설 현장에 나가시고 어머니는 평화시장에 미싱사로 일을 다니셨는데도 3남 1녀를 키우다 보니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죠. 그런데도 부모님은 무슨 생각이셨는지 구리로 이사 가서도 자식들 학교는 서울로 보냈어요. 그덕에 어쩔 때는 차비가 없어서 제기동에서구리까지 걸어 다닌 적도 있죠. 


그러다가 어머니가 자식들을 챙겨야 해서 공장에 나가는 걸 그만 두고 일거리를집에 가져와서 하셨죠.  한복을 만드셨는데 어머니가 밤새 만들면 형제들이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 자기 몸뚱이만한 짐을버스에 실어서 평화시장까지 배달을 했어요. 그때는 만원버스라서 짐을 잘 안 실어줬어요. 버스기사분이 못 타게 하면 민망한데 어쩔 때는 등교시간은 다가오는데 두번 세 번 버스를 못 타면 애가 타는 거예요그때는 버스가 짐 실어 주는 세상이 왔으면 했는데 그건 된 거 같네요. 


부모님은 먹고 살기가 버거워도 교육열은 대단하셔서 작은형은 샛길로 빠졌지만 자식들 모두 공부를 가르치셨죠. 시간이 흘러 큰형이 대학에 입학을 하고 이제 고생 끝이 보이나 했는데 형이 학생 운동하다 구속이 됐죠. 집안이 뒤숭숭했죠. 나중에 알았지만 외갓집이 해방정국에 좌익 활동에 연루되어 집안이 풍비박살이 나고 아버지까지도 힘드셨는데 그 악몽이 되살아 난거죠. 그런데 부모님이 형 문제를 계기로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니들과 만나게 되셨는데 생업도 포기하고 집회에 쫓아다니시더라고요. 한번은 서대문 구치소에 따라 갔는데 서대문 구치소 대문을 발로 걷어차며 소리를 지르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놀랬죠. 연좌제에 걸려 시달리던 부모님들에게 권력에 맞서 싸우는 민가협 활동이 해방구셨나 봐요. 형이 나중에 석방됐는데도 민가협 활동을 계속하시더라고요. 민가협에는 ‘내 자식이 아니라 우리 자식이다’ 하는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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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항쟁


대학 가면 ‘당연히’ 학생 운동하는 것


그때 전 고등학생이었는데 집안 분위기가 뒤숭숭한 상태에서 주로 친구들 집에서 살았어요. 중동고등학교가 깡패학교로 유명했는데 종로에 있다가 2학년 때 대치동 깡촌(?)으로 이사를 갔죠. 우리는 왜 이런 깡촌으로 이사를 오나 불만이고 대치동 주민들은 왜 깡패학교가 들어오냐며 불만이고 우스운 상황이었죠. 처음에는 통학버스 타고 다니다가 친구 부모님이 경기고등하교 건너편 판자촌에 방을 얻어 주셔서 다녔죠. 그때가 유일한 내 인생의 강남스타일이었죠. 겉멋이 들어서 친구들이랑 술도 한 잔씩 마시고 강남거리 구경도 하고 몰려다니면서 ‘가오’도 잡아보고, 형이 읽던 책 몇 권 읽고 가서 친구들에게 아는 척하고 그랬어요. 

한번은 담임이 형사가 찾아 왔다 하시기에 겁이 났죠. 그런데 내 문제가 아니라 형 때문에 찾아왔더라고요. 형이 석방 이후에 현장 가서 활동을 했는데 동향 파악하러 왔나 봐요. 그런 상황에서 고민이 많았어요. 부모님 고생하시는 거 생각하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형이 학생 운동해서 집안이 더 힘들어지는 걸 보면서 대학 가는 게 자신이 없었어요. 주위 친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대학 가면 학생 운동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죠. 그런데 하다 보니 친한 친구랑 같은 대학에 붙었는데 거기가 형이 다니던 대학이었어요. 부모님이 입학금을 주셨는데 고민하다가 그 돈을 들고 여행을 갔다가 등록일이 지나서 돌아왔죠.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 중 대학 간 친구들은 모두 학생 운동권이 되었죠. 혼자 건설 현장도 가보고 공장에 좀 다니면서 이래저래 다른 일을 해볼까 고민하다가 ‘그래 부딪혀보자’ 하고 다시 학교를 다니기로 했어요. 


입학하기 전에 종로의 연동교회에서 기독학생회 활동으로 시작했죠. 광주항쟁 자료도 보고 학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근데 인연이란 게 그때 청피노조(청계천피복노동조합) 복구 투쟁이 있었어요. 청피노조라는 상징성도 있고, 어머니가 다니시던 현장이고, 우리 집을 먹여 살린 평화상가에서 만들어진 청피노조를 다시 살리는 집회에 참석하면서 길거리 생활을 시작했지요. 그때는 이미 정세가 오르고 있을 때여서 이런저런 집회에 참석하면서 대학 입학 전에 연행의 첫 딱지를 뗐죠. 


신입생 같지 않은 신입생, 그리고 6월 항쟁


그리고 입학 후에는 학교에서 주로 활동을 했는데 이미 학생 운동이 대중화 되어 총학생회는 운동권 학생들이 주도했지요. 학교생활 자체가 활동이었죠. 거의 매일 집회, 세미나 등을 반복했는데 당시 선배들이 좀 당혹스러워 했어요. 신입생 같지 않은 신입생을 만난 거지요. 선배들이 같이 하자고 하면 다 갔어요. 이 조직, 저 조직 다 따라다녔어요. 노선학습보다는 뒤풀이 술자리가 더 좋았던 거 같아요.학생 운동 그 자체에는 깊은 관심이 없었어요. 형이 현장 활동을 하고 있을 때라 운동을 하면 현장에 당연히 가야하는 건데 자신이 없었죠. 그런데 1학년 때 과대표 하던 친구가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친구들이 나보고 하라 해서 과대표를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6월 항쟁을 맞았죠. 


매일 길거리에서 최루탄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보냈죠. 강의실은 수업 보이콧하기 위해서 갔던 거 같아요. 그리고 6·29 선언이 발표되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희망으로 가득 찼죠. 이어 대선 국면이 되면서 고려대에서 보여준 비판적 지지파의 맹신에 회의하면서 백선본(민중대표백기완선생선거운동전국본부) 집회에 다녔어요. 그래도 노태우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대선투표일에 두 가지 지침이 떨어졌는데 하나는 CBS 방송국 사수투쟁과 구로구청 부정투표 사수투쟁이었어요. 먼저 CBS 방송국에 가서 진을 치고 있는데 지침이 철회되고 구로구청으로 집결하라고 해서 구청으로 갔을 때는 이미 봉쇄되어 있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봉쇄를 뚫는 싸움을 하다가 전선을 확대해야 한다고 해서 종로로 나갔는데 그 황량함을 잊을 수 없어요.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무기력감과 DJ와 YS의 권력욕에 대한 분노,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는 당혹감으로 나의 6월 항쟁은 끝났어요.


그렇게 마무리된 항쟁의 여파가 나에게 닥치기 시작했죠. 비판적 지지의 선봉대 역할을 했던 학생 운동에 대한 회의와 스스로 무기력함에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부모님들은 그때도 민가협 활동을 하실 때였는데 그 단단해 보이던 민가협도 갈리더라고요. 생업도 포기하면서 민가협 활동에 열심이던 부모님들도 결국 노태우가 당선되자 좌절하시고 운동권이 되었던 집안도 흔들리기 시작했죠. 형도 현장에서 노조를 조직했는데 투쟁 과정에서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서 사업장이 깨지고, 어려움을 겪게 되었어요. 부모님은 형제들이 운동을 접기를 바라셨고 집안 갈등이 표출되었죠. 이렇게 나의 87년 봄은 지났고, 마침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시면서 병간호 하면서 학교생활을 마무리하고 공장에 갈 생각이었죠.


그런데 친구가 도와달라고 해서 다시 학교에 나갔어요. 그 친구가 과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는데 단독으로 출마하면 모양새가 안 좋다고 해서 반 들러리 식으로 선거에 나갔는데 제가 선출된 거예요. 그렇게 과 학생회장으로 1년 반을 활동했어요. 당시 87년의 절망을 딛고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과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투 쟁이 활성화되는 시기여서 연대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그 속에서 나의 역할을 찾았죠. 민주노조 사업장 사수 투쟁, 재개발 철거 투쟁 현장에서 후배들과 고민하면서 내 길을 찾아갔죠. 그리고 과 학생회장 임기를 마칠 때 총학 선거를 같이 하자는 제안이 있었는데 이미 현장을 가기로 마음을 굳힌 상황이었죠. 그런데 과 학생회장하면서 한 활동 건으로 구속이 되었죠. 그런데 형 구속됐을 때는 맨날 면회 가고 싸우던 부모님들이 내가 구속됐을 때는 면회도 잘 안 오시더라고요. 운동권이 싫어지셨나? 아니면 운동권은 으레 구속되려니 하셨나? 


현장으로, 하청업체 노동자로 첫 발을 떼다


그런데 현장을 가는데 좀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80년대 초반 학번까지는 운동권은 학생 운동 후에는 현장을 가는 게 당연한 거였죠. 84년 유화조치 이후 학교에 돌아온 운동권이 학생 운동을 활성화시키고 6월 항쟁까지 이어졌어요. 그런데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는 노동자·농민들의 대중 운동이 진전되고 있었기에 상황이 바뀌었죠. 당시 신사회운동의 흐름이 형성됐어요. 꼭 공장을 가지 않더라도 사무직이나 전문직으로 사회 진출을 해도 할 일은 많다는 것이고 6월 항쟁 과정에서 넥타이 부대의 진출이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죠. 현장을 가는 목적도, 현장 이전 방식도 변했죠. 그래도 나에게 현장은 공장이었어요. 그래서 그동안 관계를 맺고 있던 조직을 통해 현장 갈 준비를 했는데 계속 시간이 늘어지는 거예요. 한참 운동권 조직들이 재편될 때였기에 혼선들이 있었던 거 같았고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스스로 현장을 찾기로 결정하고 이미 현장에 가 있던 선배들을 찾아 다녔죠. 전국에 주요 공단은 다 다녀봤어요. 결국 인천 대원강업 하청업체에서 노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잔업을 많이 했는데 빨리 끝나는 날은 여덟 시, 보통 열 시 정도 돼요. 그럼 퇴근해서 동료들과 술 한잔 하거나 늦은 밤에 사람 만나고 다니는 패턴이었죠. 예전에는 몇몇 선진 운동 그룹들이 현장의 핵심세력들을 조직해서 주로 노조를 만들었다면, 그때는 그 노조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기였어요. 당시는 주요 사업장에 노조가 만들어져 있는 상황에서 활동가 육성에 주력했지요. 그리고 이미 노동자 정치 활동이 시작된 시기여서 현장 밖에서의 활동도 많아졌고요. 


그러다가 연행이 됐어요. 소위 신분 위장으로 현장 취업을 한 게 드러난 거죠. 이 건으로 주위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는데 정작 나는 구속이 안 되었죠.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조사 받는 과정에서 군대 영장이 나왔어요. 군 입대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에서 군 입대를 거부하고 활동(군 도바리)을 해야 하나 고민도 했는데 모두 말리더라고요.


군대는 철원 3사단을 갔어요. 사람이 살다 보면 돌고 도는 게 학교 다닐 때 농활을 간 곳이 철원이고, 한 친구는 그곳에서 농민 운동을 하고 있었거든요. 농활 때 보았던 신병 교육대의 백골을 다시 보다니. 신병 교육대를 마치고 사단에서 대기하는데 다들 자대 배치 받아 가고 나만 남은 거예요. 혼자 내무반에 앉아 있는데 행정병이 오더니 ‘너 운동권인 거 알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알려주더라고요. 늦게 페바부대로 자대 배치를 받아 갔는데  현역병들은 모두 어리고, 소대장보다 나이가 많고 중대장이랑 나이가 비슷했어요. 몇 개월이 지난 즈음 엄청 추운 겨울날 매복을 나갔다 와서 자는데 일어나보니까 같이 매복 나갔던 분대원들이 한 명도 안 보이는 거예요. 자야 될 시간에 불려가서 내가 딴 짓 안 하나 동향보고서를 쓰고 있었던 거죠. 나 버텨내는 것만 신경 썼는데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거 보니 미안하더라고. 그래서 그때부터 열심히 군 생활 했어요. 철책에서 제대를 했는데 원래 운동권 빨간 줄은 철책에 못 들어가요. 제대 전날 대대장이 부르더니 자기가 보증서를 쓰고 데리고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그 정도로 충성(?)을 했나? 군 생활 동안 운동권 때가 많이 빠졌던 거 같아요.  


현장에서, 민주화학섬유연맹 출범까지 


전역하고 다시 인천으로 갔어요. 그런데 상황이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몇몇은 현장을 떠났고 남은 활동가들도 “이제 현장에 활동 간부들은 많다. 필요한 것은 전문 역량이다.”라면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신중하게 고민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학교에 복적을 했죠. 학교는 4년 다녔는데 졸업하려면 2년 치 전공학점이 부족하더라고요. 봄방학 겨울방학 학기까지 해서 1년 만에 다 끝내고 회계하고 경영 분석 공부를 좀 했어요. 그리고 96년 즈음에 지인의 제안으로 화섬부회에서 정책실장으로 활동을 다시 시작했죠. 


당시에는 한국의 화섬산업이 잘나가던 시기였어요. 한국노총 섬유노련의 화섬부문 조직이었는데 노총 개혁파로 섬유노련 주류에 반발해 독립조직으로 운영되고 있었어요. 96년도 내가 화섬부회에서 활동을 시작하기 직전에 화섬부회의 한 사업장이었던 한국합섬에서 파업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조합원이 분신한 사건이 있었어요. 한국합섬에 대한 지원 사업부터 시작했죠. 당시 활동 목표는 소위 중간노조였던 화섬부회를 민주노총으로 바꾸는 것이었는데 현장 조합원들은 민주노총으로 가길 원하고 있었는데 지도부 다수는 변화를 주저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임단협 공동요구와 상급단체 변경 건을 엮어서 전 조합원 여론조사를 실시했어요. 그런데 조합원의 80퍼센트 정도가 민주노총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어요.  


화섬사들은 동종업종이기에 임단협이 상호 영향을 많이 받는데, 그동안은 조직력이 열악한 노조가 임금 인상률을 결정하면 나머지 사업장이 조금 상회하는 방식으로 임단협이 진행되어 왔어요. 이에 공동요구를 걸고 조직력이 약한 사업장 교섭을 묶어 두고 조직력이 강한 사업장 교섭을 끝내면 이에 맞춰 나머지 사업장 교섭을 마무리 짓는 방식이었고, 선두 사업장에 지원을 집중하는 전략이었어요. 이런 전략이 주효하면서 다음해에 공동 투쟁과 상급단체 변경을 같이 걸고 조합원 찬반투표를 진행하면서 규약 변경을 조직해 나갔지요. 한편 민주노총 내에는 섬유연맹추진위가 있어서 연맹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아직 규모가 작은 상황이었어요. 화섬부회는 민주노총으로 조직은 변경해 나가지만 민주노조 운동 역량은 아직 부족하고, 섬유연맹추진위는 전노협부터 투쟁을 통해 운동 역량은 축적되어 있었지만 규모가 작은 상황에서 두 운동의 흐름을 모아내는 작업을 했죠.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97년 두 조직이 함께 화섬연맹을 출범시키게 되었죠. 이러한 노력이 성공하는 데는 96~97 총파업 투쟁의 영향이 컸지요. 전국을 휩쓴 총파업 투쟁의 물결을 타고 화섬연맹은 출범할 수 있었지요.  


연맹을 만들고 얼마 안 돼서 IMF를 맞게 되는데 구조조정의 광풍에 전국이 휘말리게 되죠. 화섬연맹이 출범하고 처음 사무실을 대구에 뒀는데 2년 동안 대구에 내려가서 생활을 했어요. 대구에서 중소사업장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임단협을 넘는 노조 운동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죠. IMF 시기에 대규모 수출사업장은 오히려 호황이었는데 화섬도 그랬어요. 화섬에서 자원을 동원해 섬유사업장을 지원하면서 버텼죠. 당시 대구에서 폐업사업장 투쟁을 많이 했어요. IMF 와중에서 대구백화점에 세계적인 명품브랜드 하나가 입점했는데 출점 매출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금 모아 경제 살리기’의 이면을 봤습니다. 섬유업체 사장은 경영이 어려워지면 폐업하고, 그 땅 팔아 편하게 먹고 사는데 결국 죽어나는 건 노동자였던 거죠. 그래서 구조조정 대응과 산업 정책 개입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죠. 


연맹이 서울 민주노총으로 사무실을 이전하고 난 뒤에는 화학연맹이랑 통합을 추진했는데 구조조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노조의 역량을 키워야 하고 제조업은 하나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우선 규모가 비슷한 화학연맹과 통합을 추진했죠. 이런저런 이유로 반대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2년 동안 공동 간부수련회와 공동체육대회 등을 하면서 통합으로 인한 시너지 효과를 가시화시켰어요. 결국 2000년에 통합해 민주화학섬유연맹으로 출범하게 되었죠.


투쟁을 이끌어낼 산별노조 필요


이즈음 이랜드노조는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이랜드 자본의 반노조 정책에 질식 직전으로, 기존의 장을 넘어서 노조 규약도 이랜드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로 고치고 부곡 물류창고 도급 노동자들을 조직하였죠. 그리고 이랜드 자본에 맞서 물류를 멈추는 투쟁을 전개했죠. 물류창고 점거에서 중계 아울렛 점거 등 263일의 파업 투쟁 과정에서 연이은 지도부 구속에 2차 구속을 각오해야 했어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생계비를 충당해 가면서 싸웠고 결국 정규직화를 쟁취했죠. 이 투쟁 과정에서 KT 비정규 동지들의 투쟁과 연결이 되었고 이때부터 비정규 투쟁 기획전문가(?)로 불려 다녔죠. 이 투쟁 과정에서 비정규 노동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한편, 연맹 통합 이후 제대로 자리 잡기 전에 우려했던 현실이 닥쳐왔는데 화섬사업장에도 구조조정 열풍이 밀려왔어요. 이에 맞서 울산 화섬 3사(고합, 태광, 효성)가 연대파업 투쟁을 전개했으나 공권력까지 동원된 자본의 탄압으로 결국 깊은 상처를 남긴 채 마무리되었죠. 구조조정 투쟁을 지나면서 우리 노조 운동은 좀 더 진전하고 변화가 필요하고 강고한 조직이 요구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를 산별노조 운동으로 방향을 잡았어요. 


대중적인 운동이 활성화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사회정치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방향을 잡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거 같더라고요. 노동조합이 현장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사회정치세력화가 중요한데 제대로 되지 못했죠. 노동 운동이 현장에서 고립되는 것과 자기 영향력을 사회적으로 확장시키지 못하는 게 큰 고민이었어요. 노동 내부의 연대 문제가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만 해결되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자본 시스템 속에서 사용자의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게 정치적 영향을 미치는 거 같았어요. 사람들한테는 내가 어느 회사를 다니는 지가 중요하지 노조 활동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가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거죠.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을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기업별 노조 체계로는 결국은 노동 운동은 망하게 될 거고 노동자는 절망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죠. 자본과 싸우기 위해서는 노동 내부의 차이를 넘고 사업장을 넘어 조합원들의 의지와 동력을 모아내 현장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 투쟁을 할 수 있는 산별노조로 가야 된다고 생각했죠. 


누가나에게=화섬3사.jpg

구미 화섬 3사 노동자들이 공동 투쟁 집회를 마치고 가두행진을 벌였다.


구미 화섬 3사 공동투쟁 조직


그러나 조직은 바람대로 진척되지 못했고, 그동안의 활동에 지친 나는 여유가 없었어요. 하루는 연맹 위원장이 상근자들을 모아 놓고 연임 의사를 밝히는 자리에서, 나는 연맹은 혁신이 필요하다며 반대를 했어요. 선거에서 위원장 반대를 한 사람은 책임을 지고 사직하라는 요구에 연맹을 그만두었죠. 그러나 계속되는 구조조정의 압박은 나를 놔주지 않았고, 연맹에 대경본부 조직국장으로 복귀해 구조조정에 맞선 구미 화섬 3사(코오롱, 한국합섬, 금강화섬) 공동투쟁을 조직했어요. 울산 3사 투쟁의 아픔을 교훈 삼아 더 철저하게 준비했는데 조합원 교육도 교대별로 사업장을 섞어서 진행했어요. 그리고 공동요구는 구조조정에 대응해 4조 3교대 전환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했죠. 화섬 사업장이 3조 3교대 시스템이었거든요. 세 명이 24시간 일하는 거잖아요. 쉬는 날도 없고 맨날 공장에서 일하고 퇴근하면 술 한잔 하고 자고 출근하는 거죠. 도저히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닌 거예요. 4조3교대로 바꿔야 된다. 하루라도 쉬어야 된다. 자본의 인원 감축 요구에 공세적으로4조 3교대 요구를 걸고 투쟁을 했어요. 자본이 공격하면 우리는 어떻게 방어할까 고민을 하잖아요. 그럴 게 아니라 우리는 냉정하게 현실을 인정하고 우리도 적극적으로 우리 요구를 갖고 싸워야 되는 거예요.잘돼도 본전인 장사가 있고 밑져도 본전인장사가 있는데, 밑져도 본전인 장사를 판을 깔고 가야지 남는 게 있지. 그래서 그때 한국합섬 파업하면서 4조 3교대를 뚫었어요. 그러면서 화섬은 4조 3교대가 일반화됐어요. 


그때 제대로 싸운 사업장들은 비정규직하고 연대가 돼요. 사내하청을 조직하고정규직화하는 게 되는 거죠. 활동하면서 노동자 스스로 자신과 똑같은 위치에 있는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힘을 모아서 풀어가는 것을 배우는 거죠. 싸우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사람을 모을 수밖에 없죠. 그러면 사업장에 있는 비정규직도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에 쫓겨서 누가 쫓겨날까를 보면서 위축되면 같은 정규직끼리도 눈치 보고 경쟁해야 되는데 그럼 비정규직이 눈에 보이겠어요. 자기 안전판으로만 생각하는 거지.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용이나 생계 문제를 갖고 싸울 때 이걸 어떤 방향으로 갖고 가느냐 여기에 달린 거예요. 그렇게 구미 3사 공동투쟁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향했는데 목적지는 연맹이 아닌 비정규노동센터였죠.


비정규 노동 운동 속으로


내가 보기에 자본은 90년대 초반 되면서 전략을 바꿨어요. 노조를 기본적으로 인정하면서, 임금을 얼마만큼 올리느냐의 문제지 임금을 안 올리겠다고 얘기하지는 않거든요. 그러면 자기들이 임금 올려준 만큼 이윤을 포기한 거냐, 그렇지 않다는 거죠. 노조 영향이 못 미치는 곳에 끊임없이 이중 노동 시장을 만드는 거예요. 한 편에는 하도급 체계를 통해서 비용을 전가했던 거죠. 우리가 그 시기에 대응을 잘했어야 했는데 민주노조 사수하기도 바빴던 거죠. 90년대 초반에는 뭐든 다 민주노조 사수였던 거 같아요. 그게 기업별 노조 수준에서 시야에 들어오기도 힘들고···.  사실 그걸 넘어서는 투쟁을 기획하고 그러기가 힘든 시기가 있었던 거 같아요. 


구미 3사 투쟁을 마무리하고 2005년 하반기부터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근을 했어요. 그러면서 비정규 노동 운동에 대해 고민 많이 했어요. 여태까지는 정규직 노조를 설득해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죠. 그런데 비정규직 스스로가 주체로 조직하는 운동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초기에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어렴풋하기만 하고 당위적으로만 했죠.  단순히 우리 내부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풀어내는 게 필요했고, 당위적 수준이 아니라 실천적 과제로 만들어내는 게 필요했던 거죠. 시혜성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현존하는 정규직 운동도 미래가 없다, 단순히 노동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다, 이런 인식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일관되게 했던 게 이랜드 투쟁이었죠. 센터에 와서 부딪친 게 소위 기간제법으로 비정규 법안이었어요. ‘보호’라는 가면을 쓴 비정규 양산법에 맞선 싸움이었는데 비정규 노동법 개악 저지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비정규공대위)의 상황실장을 맡아 움직였죠. 주요 역할은 현장의 비정규 노동자와 사회단체를 잇는 것이었고 공대위와 전비연(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이 양축이 되어 움직였죠. 쟁점은 기한제한이냐 사유제한이냐 하는 것이었는데 결국 정부의 집요한 공격에 연대전선은 무너졌고 3년에서 2년으로 기간 단축이라는 교묘한 수정과 묵인 속에서 법안은 강행처리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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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점에서 농성 중인 마트 노동자들.


이 과정에서 이랜드 투쟁이 다시 불붙게 되었죠. 이랜드 자본은 확장을 거듭했고, 그때마다 노조를 통합하고 연대를 준비해 나갔죠. 이랜드와 홈에버는 노조를 통합했고 뉴코아 노조와는 공동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랜드는 비정규 악법조차도 회피하기 위해 2년 이상 되는 노동자들을 해고 했죠. 이에 맞서 홈에버 월드컵점 점거에서 2007년 이랜드 투쟁이 시작되었어요. 이랜드 투쟁에 대해 유례없는 연대와 지원이 조직되었음에도 정부와 자본의 공격은 집요했고, 아주 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후에야 투쟁이 마무리 되었어요. 


함께하다 보니까 비정규직 운동도 정규직이랑 비슷한 게 있어요. 대기업 언저리에만 비정규직이 조직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비정규직 운동도 대중화된 게 아니구나, 기존의 정규직 패턴을 못 벗어나는구나, 이걸 극복하지 않으면 질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양적인 면의 확장밖에 안 되겠구나 하는 고민이 들었죠. 비정규직 운동이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 운동의 활로를 열기 위해서는 넘어서야 할 과제들이 있었던 거죠.


그런 고민을 했던 시기에는 많이 지치고, 몸도 마음도 많이 망가지고, 그동안 집도 많이 못 챙기고 해서 센터를 그만두게 되었죠. 가정도 좀 챙기면서 밑바닥의 시각에서 다시 한 번 고민해보자 싶었죠. 왜냐면 사람이 관성이란 게 있어서 자기가 계속 하던 식으로 보게 되거든요. 센터를 그만두고도 한동안은 관성 때문인지 미련 때문인지 현장 연대 투쟁에 결합하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게 대리운전이에요. 대리운전하면서 처음에는 조직화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어요. 전혀 그런 상황도 아니었죠. 조직화의 길도 보이지 않았어요. 옛날 하고는 완전히 달라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사람들의 조건도 다르고, 기존에 했던 방식으로는 쉽지 않더라고요.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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