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서 모이다

by 센터 posted Jul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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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용  서울서부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뜨거운 오월


더웠다. 오월이 집회하기 좋다는 것도 옛말인 듯했다. 오월은커녕, 집회하기에 좋은 날이 과연 있을까 싶기도 했다. 전체든 부분이든 실무를 맡은 행사를 앞두면 조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라 행사 시작보다 한 시간 반 정도 이르게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도착했다. 어차피 현장에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므로 그늘 좋은 벤치에 드러눕듯이 앉아 폰을 두드리며 함께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과 연락을 했다. 그렇게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약속 시간이 다가오면서 몇몇이 도착했고, 행사가 진행될 병원 앞 인도로 향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문득 드는 의문이 있었다. 시작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지만, 내가 집회를 다닌 날 중 과연 ‘집회하기에 안 좋은 날’은 있었던가? 그늘에서 벗어나자마자 뜨거운 볕이 내 질문을 순식간에 증발시켰다. 일하자, 일, 중얼거리면서 걸음에 힘을 실었다.


인도는 좁고 사람은 많았으며, 날씨는 가혹하고 대오는 담담했다. 착용감이 너무 좋아서 입은 것 같지도 않아, 하고 평소에 자랑하고 다니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거추장스러울 만큼 힘들어하는 내가 엄살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네 시 반, 약속된 시간이 되자 신촌 세브란스병원 앞 인도는 깔판을 깔고 앉은 오십여 명의 사람으로 붐볐다. 여기에 합류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비싼 기름 값을 써대며 차량을 몇 대씩이나 몰고 온 경찰들도 가까이서 우리를 지켜봤다. 무대 방향이 바뀌고, 음향 설비를 옮기고, 발언 순서가 꼬이고, (경찰은 빼고) 모든 사람에게 뭔가 죄송한 마음이 생기는 와중에 예정 시간을 조금 넘겨 집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현장-집회.jpg

지난 5월, 연대 세브란스병원 앞 인도에서 열린 집회에 오십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곽세영)


집회는 서울서부비정규노동센터(이하 서비) 김희연 회원의 사회로 꾸려졌다. 어쩌다보니 반쯤 얼이 빠져있던 내가 첫 번째 순서로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감사합니다, 라는 진솔한 고백으로 마무리했다. 이어서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서울경인지역공공서비스지부 세브란스 분회(이하 세브란스 분회)의 조종수 분회장의 투쟁 발언이 있었다. 지난 일 년 동안 세브란스 분회가 겪은 탄압과 현황을 집회 참가자들에게 전했다. 연세대 학생행진과 페미니즘 학회 앨리스에서 활동하는 박연준 학생의 발언이 이어졌다. 세브란스병원이 속한 연세대학교의 학생으로서 학교와 병원이 노동자에게 행한 탄압에 분노하고 함께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계속해서 민중가수 임정득 동지가 공연으로 대오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세종호텔 노동조합 차현숙 사무장, 정의당 서대문구위원회 임한솔 위원장의 연대 발언이 있었고, 서울노동인권복지네트워크(이하 서로넷) 이남신 공동운영위원장이 주최 단체 대표로 인사말을 하고 집회 배경과 취지를 이야기했다. 집회 장소 인근, 가능한 한 모든 구조물에 소원천을 다는 것으로 집회를 마무리했다. 더위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들이 각자의 마음을 담은 소원천이 가로수와 전봇대 등에 달려 나부꼈다.


집회는 시작에서 끝까지 거의 정확하게 한 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집회는 너무 짧거나 (아주 높은 확률로) 너무 길어서 항상 문제가 되는데 예상했던 시간에 맞아떨어진 몇 안 되는 집회로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나를 제외한 모두가 자타공인 ‘선수’라 가능한 일이었다. 집회 실무자로서 함께 자리를 지켜주신 모두에게 감사하다. 물론 경찰은 빼고.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선 이러고 있다


집회의 정식 명칭은 ‘세브란스병원 노조 파괴 규탄, 부당해고 철회 연대의 날’이었다. 노동자를 업신여기고 명백한 부당노동행위를 일삼은 연세대와 세브란스병원의 만행을 집회 연대 제안서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갈음하여 소개한다.


“지난 2016년 7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는 청소 노동자들이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에 가입하여 분회를 결성했습니다. 가입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노조 가입 움직임이 있자 직원들이 무리지어 휴게실 앞을 가로막고 노조 간부의 출입을 제지했고 보안요원들이 병원 내부와 주변을 계속 따라다니며 노골적으로 감시하고 방해했습니다. 이러는 동안 노동자들에게는 재계약으로 협박하고 수당 인상으로 회유하며 노조 탈퇴를 종용했다는 것이 조합원들의 증언입니다. 탈퇴한 노동자들을 한국노총에 가입시켜 교섭권을 박탈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청소 노동자들은 용역업체인 (주)태가비엠 소속이고 병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 세브란스병원의 입장입니다. 문제는 노조 파괴 공작에 병원이 직접 개입하였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드러난 것입니다. 세브란스병원의 업무일지에는 ‘민노, 한노, 비노 인원 현황 상세 데이터로 주세요.’, ‘주말, 휴일 민노 서경 및 민노 조합원 동향 파악 집중 부탁드립니다.’, ‘사무부장님도 지시하신 민노 불법 행위 조치 방안 신속히 보고 바람.’ 등 노조 파괴 공모의 기록들이 빼곡합니다. 작성한 병원 파트장의 이름도 선명합니다.

예컨대 9월 8일 세브란스병원 청소 노동자와 공공노조 상근자들은 한국노총 신촌연세노동조합에 방문하여 ‘회사가 준용하고 있다는 단체 협약 열람 및 제공’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신촌연세노조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이유 없이 열람을 거부했고 태가비엠 직원, 병원 사무팀과 보안요원이 와서 퇴거를 요구했습니다. 이 일을 두고 업무일지에는 ‘한노 집행부 방문 소란 등은 철산노 위원장에게 실시간 전달하여 노노 대응 유도바랍니다’라고 적혀있고 ‘명심하겠습니다’라는 용역업체 현장소장의 답변도 있습니다. 바로 현장에는 철도사회산업노조의 유인물이 나붙었습니다.

자필 업무일지를 작성하며 노조 파괴에 개입한 사실이 밝혀진 후 세브란스병원과 연세대가 보인 반응은 가관입니다. ‘학교법인 연세대학교’ 명의로 업무 방해 가처분신청을 내고 다시 8명의 청소 노동자를 고소하는 등 사과는커녕 법적 조치를 남발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8일 개교기념식에서 대화를 요청하는 청소 노동자들을 보안직원들을 시켜 가로막았고 이 사태를 빌미로 또 7명을 무더기 고소했다고 합니다. 적반하장에 후안무치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4월 말까지로 예정된 재계약을 빌미로 협박하고 사소한 일에도 경고장, 시말서를 강요한다는 증언이 쏟아집니다. 사람을 치료한다는 병원이 오로지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핍박하고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현장-소원천.jpg

가로수에 달린 집회 참가자들이 적은 소원천(@곽세영)


기꺼이 모이다 


이번 집회는 여태 없던 시간대에 여태 없던 대오 구성으로 완성되었다. 백여 명의 참가자 중 절반은 세브란스 분회의 상급 단체인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서울경인지역공공서비스지부의 조합원이었고, 나머지 반은 서로넷 소속 단체와 지역의 단체, 정당의 구성원이었다. 세브란스 분회 조합원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집회를 잡은 터라 대부분의 직장에서는 한창 업무 시간인 오후 네 시 반에 비조합원 대오를 조직한다는 것은 서로넷 주최 집회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확하게 한 시간 남짓 진행한 성과뿐만 아니라 참가가 애매한 시간대에 지역의 활동가들이 집중해서 참가한 집회로서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에 (두 배로) 길이 남을 집회라 확신한다.


당일 집회를 함께 소화한 서비센터 회원들과 찾은 함박스테이크 가게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집회하기 좋은 날은 아닌 것 같으나 그렇다고 썩 나쁜 날도 아닌 것 같다, 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집회를 하는 데에는 좋은 날도, 안 좋거나 나쁜 날도 없는 것 같다. 다만 집회에 나가는 날은 항상 옳을 뿐, 끝나고 마시는 맥주 한잔 또한 항상 옳을 뿐, 그 정도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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