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왜 이런 음악을 틀어 놓는 거요!

by 센터 posted Apr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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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범 쉼표하나 3기 회원



높은 콘크리트 천장에 총총하게 박혀 있는 백열등은 매장 안 시간을 멈추게 했다. 간혹 아침 점심 저녁을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다. 처음 향기롭고 구수한 커피향이 느껴지지 않고 미각과 청각, 촉각 그리고 시간도 잊어버려지는 곳이다.


안녕하세요.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메리카노 두 잔과 헤이즐럿 한 잔, 카페라테 주문하셨습니다. 한 잔은 아이스로 바꿔 드렸습니다. 일만 오천 원입니다. 입력해주신 번호로 현금 영수증 해드렸습니다. 적립 역시 도와드렸습니다. 통신사 할인카드가 있으시군요. 사용가능합니다. 포인트 차감해 드릴까요. 취소하고 다시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5만 원 미만은 서명해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미소를 보여준다. 주문은 반복되고 응대도 반복된다. 뒤에서 커피머신 작동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한쪽에서는 갓 추출된 커피가 봄 손님을 기다린다. 커피프랜즈 잭입니다.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시고요? 저쪽에서 잠시만 계시면 주문하신 맛있는 커피가 나옵니다. 다음 손님. 안녕하세요.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본사에서 직원 평가단이 나온다고 했다. 잭은 평소보다 더 친절히 손님을 응대했다. 웃음이 많아졌고, 어울리지 않았던 콧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흘러 나왔다. 실제 잭이 그런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매장 밖을 벗어나면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나왔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나면 매장 안 직원들은 물과 햇볕이 부족해 시들어가는 화초가 된다. 교대로 식사를 하고 담배 한 대를 피우거나 카페인 가득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매대로 돌아오면 금방 싱싱해진다. 안녕하세요. 커피프랜즈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점심시간 때를 2차 대전이라고 부른다. 이때는 한 시간 일하고 십 분 휴식한다는 내부 근무 규정이 깨지는 시간이다. 늘어선 줄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직원 여섯 명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말하는 즉시 정신없이 커피를 생산해낸다. 뽑고 또 뽑는다. 가장 만들기 쉬운 커피는 역시 아메리카노로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한 선수는 눈에 익은 손님을 보면 미리 뽑아내기도 했다. 매장 내 직원들은 잭, 바우어, 콜리, 샐리, 톰슨, 홀리 등 이국적인 서양 이름을 갖고 있다.


출근시간 때인 1차 대전에서는 아메리카노가 대세다. 빠르게 뽑아내야 하고, 테이크 아웃 손님이 많다. 가끔 머그잔 주문을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요구사항이 있어도 침착하게 웃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말수가 줄어도 상관없다. 일단 웃음의 기운만 손님에게 전달되면 된다. 사실 손님들도 바쁘기에 큰 대우를 받기 원하지 않는다. 뒤통수의 시선이 많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점심 직후 2차 대전은 뭔가 주문이 길어진다. 핫과 아이스가 섞이고 복잡해진다. 그리고 손님 당 응대 체류 시간도 길어지게 된다. 주문이 바뀌는 경우도 많다. 3차 대전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어디선가 중국 관광객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대략 난감이다.


매장 밖 태양이 떨어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대체로 일반 직장인이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고 맥주 한 잔 후 집에 가려고 할 때쯤이다. 한 사내가 매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8명의 직원 중 잭과 홀리만 남아 있다. 홀리는 2층 테이블을 정리하러 자리를 비웠다. 스피커에서 첼로가 연주됐다. 안녕하세요. 커피 프랜즈입니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중절모를 쓴 사내는 약간 비틀거리며 매대 앞으로 다가왔다. 뭐가 있나. 아.. 메.. 리카노. 사이즈는 어떻게 드릴까요? 뭐.. 뭐가 있나. 레귤러, 빅 사이즈가 있습니다. 500백 원 차이입니다. 참 새로 들어온 콜롬비아 원두가 있는데 즐겨보시는 것은 어떤지요. 뭐. 그런 거 필요 없고, 큰 놈으로 주소. 그 뭐라 위에 달달한 거품 들어가 있는 거. 카푸치노 말씀이지요, 손님. 그건 모르겠고, 달면서 쓴맛 나는 거 그거 알아서 해주소. 예,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카푸치노 빅 사이즈 해 주셨고요. 오천 육백 원입니다. 사내의 손이 두터운 솜 점퍼 주머니로 들어갔다가 바지 주머니로 옮겨갔다. 구겨진 만 원권을 테이블 위에 내놓았다. 펴지지 않은 돈이 툭하고 떨어졌다. 잭은 돈을 폈다. 만 원 받았습니다. 현금 영수증 하시겠습니까? 여기 앞에다 전화번호를 입력해 주세요. 뭐라고. 왜 전화번호를 물어보는데. 신상 털려는 거 아냐? 그건 아닙니다. 꼭 하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손님의 소중한 개인정보를 저는 여기서 볼 수 없습니다. 단지 전화번호 앞자리만 보일 뿐입니다. 안전합니다. 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자 이제 번호를 넣어주세요. 잭은 다시 한 번 미소를 만들었다.


이것보다 더 큰 것은 없나. 예, 알겠습니다. 더 큰 것은 육천 육백 원입니다. 그럼 방금 전 주문한 거 취소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결제하겠습니다. 잭은 진상 손님을 만났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마주치지 않기로 했다. 차라리 단말기와 대화하는 편이 나았다. 적어도 기계는 응대에 맞는 답이 나왔다. 아 신용카드로 해도 되나. 난 현금이 별로 없거든. 잠깐만 기다리소. 잭은 다시 기다렸다. 매장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손님은 검게 손때가 묻은 누런 점퍼 주머니를 다시 뒤졌다. 금빛 신용카드가 나왔다. 카드를 받아 결제하면서 취한 연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 모자가 잘 어울리시네요. 잭은 손님에게 조심스럽게 골드카드를 건넸다. 혹시 더 필요하신 거 없나요? 뭔가 임팩트가 필요했다. 저쪽에서 조금만 기다리시면 맛있는 커피가 나옵니다. 잠시만 음악을 즐기며 기다려 주세요. 커피프랜즈의 잭이었습니다. 잭의 미소와 손짓을 기다렸다는 듯 손님의 혀 꼬부라진 소리가 커피숍을 울렸다.


“여기는 왜 이런 음악을 틀어 놓는 거요! 도대체 여기가 어느 나라요? 잔돈은 언제 줄 거야!”

잭은 멍하니 손님을 바라봤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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