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은 꿈_박금자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위원장 2

by 센터 posted Apr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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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지난 호에 이어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박금자 위원장의 두 번째 인터뷰 글이다. 고3 수험생 딸과 가족에게 ‘내 인생을 살아보겠다’며 교육감 선거 운동에 뛰어들고, 다시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조리사, 조리원들, 행정실 사무보조원들을 설득하며 노동조합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2010년 10월 17일 전남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을 출범시켰고, 5만여 명의 조합원과 함께하는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을 이끌고 있다. 흩어져 있던 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전국 단위로 만들기 위해 방방곡곡을 누비며 발품을 팔았던 여성 활동가로서의 고충도 만만치 않았다. 답답하고 힘든 과정들도 많았지만, 박금자 위원장은 따로따로 소속되어 있는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언젠가는 하나의 산별로 모으는 것을 꿈꾼다.      

인터뷰·정리 : 이진훈 쉼표하나 6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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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기회-교육감 선거


2004년도에 노동조합을 실패하고 나서 그전의 일상으로 돌아왔어요. 여전히학교급식조리사로 일하고, 자식들 공부도 챙기고 그러면서 특별한 활동 없이 지냈어요.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노동조합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것에 대한 응어리가 남아 있었어요. 그 패배감을 항상 가지고 지내다 보니 나이는 40대 후반으로 접어드는데 실패한 인생인 것 같고 우울한 감정에 한참을 힘들어 했어요. 

2007년에 연봉제로 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었지만 처우가 달라지지는 않았어요. 무기계약직이라는 것이 계약서만 쓰지 않는다 뿐이지 전혀 달라진 게 없었어요. 줄어든 근무일수는 여전했고 근속년수도 인정받지 못했어요. 근속년수가 16년이지만 2010년에 제가 월급으로 받았던 돈이 84만 7천 원이었어요.


그렇게 2010년이 됐는데 그해 6월 2일에 교육감 직접선거가 있는 거예요. 그게 눈에 확 들어오면서, 학교급식조리사들 처우를 개선하는데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어요. 다시 뭔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죠. 그게 그해 1월이었어요. 그때부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노동조합은 없어졌지만 학교급식조리사협회로 모임을 유지하고 있었거든요. 가끔 지역대표 모임도 갖고 연락도 하고 그렇게 지내고 있었는데 그 분들에게 연락해서 잘하면 살길이 열릴지도 모르겠다고 설득했어요. ‘우리 처지를 들어줄 만한 교육감을 선택해서 선거를 돕고 당선시켜서 조리사 분들 처우 개선을 요구하자, 그러면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설득한 거죠.


그렇게 작심하고 선거 일을 하려다 보니 집안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더라고요. 학교급식조리사 일은 그 일대로 해야 하고 선거 일은 오후 5시 퇴근 후에 해야 되니까 시간이 없더라고요. 그때 작은아이가 고3 수험생이고 또 남편은 고3 담임인 거예요. 다들 바쁘고 시간 없을 땐데 그래도 제가 하려는 일은 해야겠고 해서 하루는 두 사람을 불러 앉혀 놓고 얘기했어요. 난 여태 가족을 위해 살았고 내 인생이 별로 없었다. 1년만 내 인생을 위해서 살아 볼란다. 그러니 집안일은 분담해서 하자. 그런 식으로 선거 운동에 전념하겠다는 선언을 한 거예요. 


교육감 선거 운동에 올인


그때 교육감 선거에 후보로 나온 분들이 7명이 있었어요. 그중에 순천대학교 총장이었던 장만채 교육감 후보를 돕기로 했어요. 그래서 1월부터 교육감 후보 지지자 카드도 만들고 조리사 분들 만나서 설득도 하고 열심히 뛰어 다녔어요. 그랬더니 조리사 분들이 호응을 해주시더라고요. 자신들의 처우가 나아지지는 않고 적은 월급은 몇 년 동안 동결이지, 노동 강도는 심해서 몸은 아프지,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교육감 선거에 희망을 걸고 모여지더라고요. 


그때 우리가 학교급식조리사로 일하면서 불합리한 점이라고 정리한 요구사항이 8가지 정도였어요. 우선은 교육감 직접고용이었어요. 그래야 고용안정이 될 수 있잖아요. 당장처럼 각 학교 소속이면 학교 입맛대로 좌지우지되거든요. 두 번째는 365일 상시근무였어요. 월급 적게 주려고 근무일수 꼼수를 부려서 245일이니 275일이니 이런 근무일수 급여 체계는 잘못됐다는 거예요. 세 번째는 위험수당을 지급하라는 거였죠. 조리사들이 일하는 곳이 불도 만져야 되고 위험하거든요. 네 번째는 호봉제 인정이었어요. 한 달 일한 사람과 이십 년 일한 사람의 월급이 같다는 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거거든요. 그렇게 8가지 정도를 정리해서 교육감 후보 진영에 보여주니 첨엔 이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래서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설명을 했어요.


그렇게 1월, 2월은 지지자 카드도 작성하고 조리사 분들 찾아다니면서 설득하고 모임 결성도 했고, 3월에는 장만채 교육감 후보 진영에 찾아가서 선거 운동 캠프에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됐어요. 그렇게 모은 지지자 카드 수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어요. 

교육감 선거 유세에는 사람들이 모이지도 않더라고요. 그래서 조리사 분들이 각자 아는 사람들과 같이 참석하기로 하고 모였어요. 토요일, 일요일에는 200명 300명이 우리 후보 선거 유세에 모여서 율동도 같이 하고 하니 지나는 사람들 눈길을 끌었어요. 또 평일 퇴근 후에는 전화 홍보 작업을 하면서도 무척 열심히 했어요. 그때는 미친 것처럼 아무것도 뵈는 게 없었어요.

그런데 지지도 여론조사에 만날 3위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같이 활동하던 조리사 언니들이 난리가 난 거죠. 이러다 당선 안 되면 어쩌냐, 지금이라도 다른 캠프를 알아봐야 되는 것 아니냐. 이런저런 불안들이 튀어 나왔어요. 그러다가 투표 3주 앞두고 여론조사에 드디어 1위 후보로 올라섰어요. 그 이후로 1위를 계속 유지하면서 당선까지 되신 거예요. 지금 와서 되돌아 봐도 선거 운동을 정말 미친 듯이 했던 것 같아요. 선거 끝나고 두 달이 지나도 선거 유세에 쓰이던 황진이 개사곡이 잠결에 들릴 정도였거든요. 


진보 교육감 당선, 학교비정규직 실태조사


사실 6월에 교육감이 당선되고 나서 함께 선거 운동 했던 학교급식조리사 분들에게 조심스럽게 노동조합을 해보자는 얘기를 꺼냈어요. 그랬더니 “어렵고 불가능한 일을 왜 하려고 하나’, ‘이제 정년도 얼마 안 남았는데, 뭐 하러 그 고생을 하느냐.” 하는 거예요.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2004년도에 노동조합이 실패한 경험을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또 다시 한 사람, 한 사람 설득해 나갔어요. 지금 우리 처우에 관심 있는 교육감이 당선되었지만 이 분이 다음번에도 당선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면 다시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어떠한 교육감이 오더라도 교섭할 수 있는 우리 조직이 필요하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꼭 필요하다고 설득해 나갔어요.

한편으로 선거 캠프에 있을 때부터 학교급식조리사들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서 얘기해왔기 때문에 당선된 교육감은 취임하자마자 학교비정규직 실태조사를 지시했다더라고요. 네 번 정도를 지시했다는데 제대로 안 돼서 교육청을 뒤집었대요. 교육청에서도 학교비정규직들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예요.


그 실태조사 과정에서 학교급식에 일하는 직군 영양사, 조리사, 조리원들이 자신들의 처우가 먼저 개선되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교육청 예산이 한꺼번에 다 올릴 만큼은 안 되니까 점차적으로 개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계속 우리들 주장만 할 수는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제일 열악한 곳부터 개선하자고 했죠. 조리원들이 제일 열악했어요. 제 월급이 84만7천 원일 때 그 분들은 79만 원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얘기하니 같이 선거 운동을 했던 조리사들의 원성이 많았어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먹을 건 다른 곳에 보내냐는 거였죠. 잘못하면 어렵게 찾아낸 기회를 날릴 수도 있겠다 싶어서 다시 또 열심히 조리사 분들을 설득했어요.


그러한 과정이 지나면서 교육감이 8월 17일에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교육청 실무자들과 구체적으로 처우 개선 방법을 의논하게 된 거죠. 이 문제에 대해서 누구보다 많은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이전부터 준비한 생각들을 얘기했어요.

근무일수를 늘려야 한다. 당장 공무원과 같은 상시근무일수로 인정되지는 않더라도 월급이 깎이기 이전의 근무일수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얘기했죠. 시급을 조금 올리는 문제와는 다른 문제거든요. 예산 문제도 있고 한꺼번에 올리지는 못했지만 245일 근무일수를 20일을 추가한 265일 근무일수로 늘렸고, 명절상여금을 만들었고, 많지는 않지만 근속 인정을 받아냈어요. 369라고 3년에 1만 원씩 추가 수당을 받아낸 거예요. 적은 돈이긴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런 요구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러한 개선사항을 기자회견을 통해서 공표해달라고 했죠. 그래서 9월 6일에 기자회견을 하게 되요. 그래서 노동조합을 조직하는데 탄력을 받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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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창립 선포대회를 개최했다.(@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


다시 노동조합 : 전남학비노조 출범


그렇게 만들어지게 된 노동조합이 전남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이었어요. 2010년 9월 18일에 설립총회를 하고 한 달 뒤 10월 17일에 출범식을 크게 했어요. 엄청 빠르게 진행된 거죠. 그 기반은 역시나 학교급식 조리사들의 조직이었어요. 2004년도에 노동조합을 포기했지만 그 이후에도 협회 형식의 조리사 조직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새롭게 2010년 노동조합을 설립하게 된 큰 힘이었어요. 그 힘을 바탕으로 급식을 우선으로 해서 조리사뿐만 아니라 조리원 분들도 빠르게 조직이 됐어요. 같은 장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니 그럴 수 있었죠. 


하지만 학교 행정실에서 사무보조 일을 하시는 분들은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어요. 그분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어서 전화로 조직을 했어요. 그분들 근무일수는 275일이여서 방학에도 일정 기간 출근을 하는데 그 기간 동안 전남에 있는 각 학교마다 전화를 했어요. 집에서 밥도 안 먹고 계속 전화만 돌렸더니 나중에는 균형을 못 잡고 쓰러지더라고요. 또 전화해서 열심히 설명을 해도 잘 들어주지도 않고 끊어 버리고. 근데 가끔 들어주시는 분이 있어요. 그때는 다음날 부리나케 찾아가요. 그게 어디든 찾아가서 그 지역에 사무보조 분들을 조직할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드리고 하면서 열심히 조직했어요. 그때 조합원으로 가입시킬 때 조합비 외에 가입비를 받았어요. 출범식을 계획하고 치러야 하는데 비용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가입비 2만 원씩을 받았는데, 월급도 적은데 가입비 2만 원 내기가 쉽지 않죠.


그런데도 2010년 10월 17일 노동조합 출범식에 2천여 명의 조합원이 모여서 거대하게 치렀어요. 순천 팔마체육관에서 출범식을 열었는데 민주노총 위원장님도 왔고, 전교조 위원장님도 왔고,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님도 참석했고, 거기다가 전남지역 교육감이 직접 축사를 하는 큰 규모의 출범식이었어요. 

그때 제가 노동조합 위원장을 맡아서 휴직을 하고 상근직 위원장으로 노동조합을조직하는데 전념을 하면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아침부터 30개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가입원서와 가입비를 받았어요. 노동조합으로 조직 안 된 학교의 급식부터 차근차근 학교 행정 업무를 보는 쪽으로 확대해 나갔어요. 시간이 조금 지나가니까 행정 업무 보조 분들이 점차 자신들의 모임도 만들게 되고 조합원으로 조직이 됐죠. 2011년도에 교무 행정 보조 선생님들을 275일 근무일수에서 365일 상시 근무자로 전환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점점 그 규모가 급상승하게 됐어요.


저는 전남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을 만들면서부터 학교비정규직노조는 전국단위의 노동조합으로, 하나의 노동조합으로 힘을 모아야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야 지방교육청에서 해결 못하는 부분을 교육부를 상대로 요구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당시에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이 전남 말고도 여성노조에 일부, 강원지역에서는 공공노조 소속의 학교비정규직노조가 있었어요. 노동조합 외에도 온라인상으로 소통을 하고 있었던 전국회계직연합회(전회련)가 한 200명 정도 있었어요. 이런 조직들이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2010년 11월에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공공운수노조와 전회련 그리고 저희(전남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와 광주지역노조가 함께 모이기 시작했어요. 상급단체는 나중에 정하더라도 먼저 하나로 모여서 힘을 집중하자는 거였죠. 사실 저희 조직 외에는 조합원 조직 규모가 미미했어요. 하지만 전국 단위로 확대하기 위해서는 다 내려놓고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통합된 조직에서 조직 활동을 하는 조직부장을 할 생각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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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급식비 투쟁 삭발식(@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


뭣이 중한디


그런데 서울에서 회의를 하면 의견도 전혀 모아지지 않고 뭘 하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이미 광주와 전남에는 4천 명의 학교비정규직이 조직되어 있는데 이 통합회의에 모인 사람들은 왜 이리 함께 모이기가 힘든 건지. 아무 소득 없는 회의를 6개월 동안 하다 보니 너무 답답하더라고요.민주노총의 구조라든가, 산별 조직 체계 등을 알아가게 되면서 기득권, 자신의 산별 조직 간 이익을 우선 챙기는 걸 보면서 굉장히 실망하게 됐어요. 이것을 알기 전에는 민주노총은 제게 영웅 같고 신 같은 존재였거든요. 세상이 이런 건가? 라는 절망감도 들더라고요. 회의 때마다 전남에서 네다섯 시간 무궁화호를 타고 와서 또 회의를 네댓 시간씩 하는데 아무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거예요. 집안일은 다 팽개치고 자식들 수능시험도 못 챙기면서 조합원 조직 활동을 하고 있는데, 별의별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모함만 듣게 되니 제 입장에서는 너무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그런 답답하고 힘든 과정을 지나고 흩어진 마음들을 봉합하면서, 2011년 2월 19일 전회련이랑 공공운수노조, 전남학비랑 같이 전국단일노동조합으로 고려대에서 출범식을 하게 되었어요. 여전히 상급단체는 정하지 않고 우선 전국단일조직을 만들자고 합의가 된 거죠.


출범식은 했는데 전국노동조합 등록필증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런 과정에서 2011년 3월에 전회련과 공공운수노조 일부가 이탈해 나가 버렸어요. 전국단일노조가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지역노조 등록필증을 받아서 나가버리더라고요. 그 조직이 2011년 7월에 공공운수노조 소속으로 들어갔어요. 전국필증이 필요한데 우리 쪽은 전국필증이 나오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조직이 나눠지게 됐어요.


전국단일조직 만들기 위해 방방곡곡 누벼 


저는 학교비정규직노조가 민주노총총연맹 산하의 산별노조가 되기를 원했는데 그게 되지 못했어요. 그러면서 소속이 없는 노동조합으로 남겨진 거예요. 그렇다고 노동조합으로서의 활동을 멈출 수 없었어요. 2012년에 교육감들이나 교육부와의 교섭을 하기 위해서는 전국조직으로 확대되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조직 활동을 전국단위로 넓혀 갔어요. 우선은 충남지역에서 시작했는데 그곳에서는 “민주노총 소속이 아니네”, “CMS 사기꾼이네”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런데도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하나하나 상황 설명을 하고 또 제가 생각하는 방향을 설명하면서 조직을 해 나갔어요. 제가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이었으니 뭐가 불합리하고, 뭐가 제일 신경 쓰이는 지를 잘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음해성 소문에도 약 300명 정도를 조직해 냈어요. 그런데 민주노총 충남본부에서는 조직한 사람들을 내놓고 나가라는 거예요. 도대체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안 되는 일이었죠. 학교비정규직 전국단일조직을 만들려고 이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그걸 다시 갈라 놓으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다행히 잘 마무리됐지만,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각 지역마다 특색이 있다는 걸 느끼겠더라고요.


학교 현장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실망하지 않고 조합원 가입원서를 받아서 나왔어요. 당일이 안 되면 며칠 지나서라도 다시 찾아가서 꼭 가입원서를 받았어요. 그런 각오가 아니면 일이 안 되겠다 싶었던 거죠. 다행히 제 얘기에 공감해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더 열심히 했어요.


강원도에서는 정말 힘들었어요. 처음에 춘천을 갔는데 기존 공공운수노조 지역노조에 학교비정규 분들이 한 500명 정도 가입되어 있었더라고요. 어디에 어느 정도로 있었는지는 몰랐는데 이미 우리 노조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너무 퍼져 있어서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원주로 갔어요. 원주를 조직하면서 지회 간부를 먼저 세우고 있었는데, ‘우리 학비노조 조합비는 민주노동당의 당비로 다 들어간다더라’ 뭐 이런 소문이 돌면서, 그 지회 간부가 찾아와서는 난리가 난 거예요. 다행히상황 설명을 했더니 이해를 하더라고요.또 그렇게 한 고비를 넘기면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어요. 


현장 조직을 하는데 민주노총 소속이 아니라 힘들었고, 지역 색이 있어 힘들었고,노동조합 전국필증이 없어서 어려웠어요.그렇지만 학교비정규직 전국단일조직을 위해서 힘들게 견뎠어요. 그런 과정에서 다행히 2011년 12월 30일에 드디어 바라던 노동조합 전국필증이 나왔어요. 민주노총 소속이 아닌 상태로 4년 동안 아무 지원 못 받고 조직 활동을 해왔지만, 전국필증이 있어서 교육감들과 교섭을 할 수 있었고 점차 조직이 확대됐어요. 


지금은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산하조직으로 소속되어 있어요. 전국적으로 학교비정규직들이 약 14만 명 됩니다. 방과 후 교사와 같은 특수고용직까지 포함하면 약 40만 명 되고요. 그중에서 현재 우리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의 조합원은 5만여 명 돼요. 공공운수노조 소속 학교비정규직 조합원 외에도 여성노조, 서울일반노조 소속 조합원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방과 후 강사 등 특수고용직은 당장 우리 노조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조직이나 교육, 경제적 지원을 하고 있고 별도의 노조로 서비스연맹에 소속돼 있어요.

학교비정규직이 지금은 따로따로 소속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하나의 산별로 모여서 교육부와 또 교육감들과 직접 교섭하는데 큰 힘을 낼 수 있는 조직으로 확대되었으면 합니다. 그 활동을 멈추지 않고 해 나갈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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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교육부와 단체교섭을 진행 중인 조합원들.(@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


노동조합이 있어 달라졌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정말 신경 쓰였던 부분은 제가 중년의 여성이고 가정주부로서 주위에서 도덕적으로 색안경을 끼고 볼까봐 걱정이었어요. 이상한 소문이 돌면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데도 그렇고 가족에게 해가 될까봐 신경이 엄청 쓰이더라고요. 그래서 철저하게 관리했어요. 사실 남자였으면 신경 안 써도 될 일들인데 많이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제가 맘먹고 이런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의 이해가 있어서였을 거예요. 돌이켜 보면 가족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부분이 많아요. 남편에게는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을 많이 이해해줘서 고맙고, 아이들에게는 고3때도 신경 써주지 못했고, 집안일도 많이 신경 쓰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크고요. 그런데도 둘 다 잘 커서 직장생활 잘하고 있어요.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때로는 실망도 하고, 때로는 화도 나고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어요. 노동조합으로 인해서 학교비정규직들에 대한 처우가 눈에 띄게 달라졌거든요. 2010년도에 제 월급이 84만 7천 원이었는데, 지금 전남교육청에서 받는 월급이 200만 원이 넘어요. 몇 년 사이에 급여나 처우가 확 달라진 거예요. 노동조합 이전처럼 학교 교장 맘대로 해고할 수도 없거든요. 그러면서 인간으로서 당당함과 자존감도 되찾게 된 거예요. 이런 변화를 만들어 낸 것에 학비노조 조합원들이 큰일을 한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일반 사기업에도 퍼져 나가서 우리가 사는 사회가 취업에, 생계에 불안하지 않고 안정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교육할 때 이 말을 꼭 하는데요. 4~50대 여성 노동자들, 가정주부들, 학교비정규직들 이런 우리가 자신의 자리에서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고 균등하게 유지되게 하는 방법은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유지하는 것. 그래서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 내는 것.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불안한 사회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불안한 사회를 물려 줄 수는 없다고, 저는 그렇게 교육을 하고 또 그렇게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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