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길을 찾다] 노동 존중 시작은 ILO 기본 협약 비준에서

by 센터 posted Apr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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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



국제노동기구(ILO)는 노동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유엔 기관이다.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직후인 1919년 출범한 ILO는 세계 평화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산업 평화와 사회 정의가 이뤄져야 하는데, 그 출발점은 일터에서의 노동 기준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를 위해 ILO는 국제 수준의 노동법, 즉 국제 노동 기준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모든 나라에서 적용될 수 있는 국제노동법을 제정함으로써 사회 정의를 달성하고 세계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 ILO의 목표다. 

ILO의 의사 결정은 회원국에서 파견한 노사정 3자 대표자들이 한다. 따라서 ILO가 만든 기준은 ‘노동’이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과는 달리 노사정 3자의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ILO 기준은 노동자를 위한 기준인 동시에 사용자를 위한 기준이자 정부를 위한 기준인 것이다. ILO는 유엔 산하 기관이다. 이는 ILO 기준이 유엔 기준과 다르지 않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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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국가인권위원회 주최로 열린 결사의 자유 관련 ILO 핵심 협약 비준 방안 토론회


1919년 가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ILO는 1호 협약을 만들었다. 하루 8시간, 주 48시간이 내용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한 주는 이레, 즉 7일이다. 이때 1호 협약을 포함해 모두 여섯 개의 협약이 만들어졌다. 야간 노동·여성 노동·아동 노동을 규제하는 협약들이었다. 지금까지 ILO가 만든 협약은 189개에 달한다. 노동 시간, 보건 안전, 근로 감독, 결사의 자유, 단체 교섭권, 강제 노동, 아동 노동, 노사정 협의, 노동 행정, 모성 보호, 단시간 근로 등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내용이다. 


ILO가 만든 189개 협약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한 것은 29개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정부의 ILO협약 비준율(전체협약수÷비준협약수)이 15퍼센트 대에 머무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대한민국의 ILO 가입은 1991년 이뤄졌다. 2019년이면 백주년을 맞는 ILO의 역사에 비해 대단히 짧다. 가입이 늦은 만큼 협약 비준이 많이 이뤄지지 못했다. 둘째, 대한민국 정부는 ILO협약 비준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 중요한 협약에 대한 비준 자체를 아예 거부해왔다. 이는 ILO 기본 협약 8개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한 게 4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특집-표.jpg

핵심 노동 기준(Core Labour Standards)으로도 불리는 ILO 기본 협약(Fundamental Conventions)은 △결사의 자유와 단체 교섭권, △강제 노동 철폐, △아동 노동 철폐, △동등대우 및 차별 금지 등 4개 영역의 8개 기본 협약을 말한다. 핵심 노동 기준은 1998년 ILO가 ‘일터의 기본 원칙과 권리에 관한 ILO 선언(ILO Declaration on Fundamental Principles and Right at Work)’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정식화되었다. 회원국 정부의 비준 여부와 경제 발전 수준에 상관없이 모든 나라의 모든 사업장에 8개 기본 협약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ILO의 입장이다. 국제 노동 기준이란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ILO의 189개 협약을 말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ILO의 기본 협약 8개를 말한다. 


ILO 기본 협약 비준 문제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점은 김영삼-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비준이 조금씩 이뤄졌는데 반해, ‘참여’ 정부를 표방한 노무현 정부 5년 동안에는 기본 협약 비준이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가 87호 결사의 자유 협약을 비준하지 못하는 이유는 노동자의 자유로운 노조 결성과 가입을 가로막고 있는 현행 법령을 개폐할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설립은 어떠한 차별도 없이 사전 허가 없이 가능해야 하는데 현실의 법제도는 그렇지 못하다. 


노동조합의 규약 및 규칙을 정하는 데 있어서도 노동조합의 자율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못하고 관청의 부당한 개입이 가능하다. 해고자는 임원이 될 수 없다며 전교조를 탄압하는 게 대표적이다. 누구를 조합원으로 둘지는 노조 규약을 통해 조합원들이 자율적으로 정하는 것이지 국가의 승인이나 사용자의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게 87호 협약의 취지다. 정부 당국의 행정권으로 노조가 해산되고 노조 활동이 중지되는 오늘의 현실은 결사의 자유를 부정하는 법령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군인노조도 허용하고 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경찰과 소방관에게조차 결사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고 있다. 비군사적 업무에 종사하는 민간인까지도 단결권을 제한받고 있는 것이다. 


98호 단체 교섭권 협약은 교섭 창구 단일화 조항을 통해 법률로 단체 교섭 상대를 지정하거나 제한하는 것을 강제한 한국의 법령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또한 노동관계법의 필수유지업무 조항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단체 교섭권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특히 98호 협약은 ‘노동자단체를 사용자 또는 사용자단체의 지배하에 두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용자의 노동조합에 대한 재정상의 원조 등을 금지하는 데 반해, 현행 법령은 노동조합 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을 전반적으로 금지함으로써 노조 활동의 자유에 제약을 가하고 있다.1)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87호 협약과 단체 교섭권을 보장한 98호 협약에는 파업권이 당연히 포함된다. ‘파업권은 87호 협약에 보장되어 있는 단결권으로부터 당연히 나온다’는 게 ILO의 입장이다. 더 나아가 순전히 정치적인 목적의 파업이 아니라면, 파업이 ‘경제적 사회적 목표를 갖고 있더라도 전국 수준의 총파업도 정당하다.’ 따라서 최저임금 인상, 단체 협약 이행 존중, 물가 인하와 실업 등 경제 정책의 변경을 요구하는 총파업은 정당하며 노동조합 조직 활동의 정상적인 영역에 속한다. 민영화, 구조조정,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는 총파업은 노동조합의 합법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반면, 현행 법령은 단체 교섭 안건을 임금과 노동 조건 등 직접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로만 좁게 한정시킴으로써 정리해고·구조조정·정부 정책 등 노동자의 노동 조건과 그 가족의 삶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안들을 배제하고 있다. 29호와 105호 강제 노동 금지 협약을 비준하지 않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현행 법령이 ILO가 금지하는 강제 노동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역병 복무를 대체하는 공익근무요원이나 전투경찰·의무경찰 등이 대표적인 강제 노동이다. 민간인 노동자가 해야 할 정상적인 일자리에 현역 군인을 투입해놓은 것이다. 특히나 대한민국은 강제 노동의 범주에서 제외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조차 허용하지 않는 나라다. 민간수용소도 강제 노동의 문제다. 외국인 노동자의 자유로운 직장 이동을 제한한 제도도 강제 노동에 해당한다. 이들 법령은 강제 노동을 금지한 근로기준법에도 위배된다. 


또한 파업에 대한 대항 수단으로 형법상 업무방해죄를 적용하여 징역형을 부과하고, 국가보안법과 집회·시위법을 통해 정치범·사상범에 대해 강제노역을 수반하는 징역형을 부과하는 것도 강제 노동에 해당한다. 또한 공무원이 정치 운동이나 노동 운동에 관여하는 것을 처벌할 목적으로 강제노역이 수반되는 징역형을 부과하는 공무원관련법도 강제 노동 금지를 훼손하고 있다. 


5월 9일 대통령선거를 맞아 모든 후보들이 노동 존중을 외치고 있는데, 그 시작은 ILO 기본 협약, 특히 87호 결사의 자유 협약, 98호 단체 교섭권 협약, 29호와 105호 강제 노동 금지 협약의 비준이어야 한다. 새 대통령은 여름휴가 전까지 국무회의에서 ILO 기본 협약 비준을 결의하고, 비준안을 가을 정기국회에 제출하며, 국회는 올해 안에 비준을 마무리해야 한다. 이후 1년의 시간을 갖고 협약에 저촉되는 법제도를 개폐하는 작업을 진행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2018년 6월 열리는 ILO총회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참석해 ILO 기본 협약의 비준에 관한 보고연설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2018년 가을 정기국회에서는 핵심 노동 기준에 위배되는 법률 개정 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노동 존중의 실체요 핵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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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용자가 노조전임자의 임금을 지급해서는 안 된다는 법 조항과 관련해서는 해석과 논쟁의 여지가 있다. 노조전임자 임금은 사용자 소유의 돈이 아니라 기업 소유의 돈에서 지급된다. 법적 지위에서 사용자와 기업은 다르다. 노사관계는 노동자와 회사(社)가 맺는 관계가 아니라, 회사라는 장에서 노동자와 사용자(使)가 맺는 관계다. 실제로는 노조전임자 임금이란 노동자 대표가 사용자의 돈이 아니라 회사의 돈을 받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사용자의 원조 금지는 ‘사용자 혹은 사용자단체에 의해 지배되는 노동자단체의 설립 촉진’이라는 목적과 더불어 원조의 원천이 사용자의 사적 주머니인지 회사의 공식 자금인지를 갈라서 판단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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