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파괴하는 직장 내 괴롭힘

by 센터 posted Apr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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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아 센터 이사, 한림대 교수 


2014년 겨울, 한국비정규노동센터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사무금융노조에서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를 하려 하는데 함께하겠냐는 제안이었다. 노동 문제에 대한 별다른 식견도 없고 변변찮은 강의와 연구 사이에서 늘 시간 부족에 시달리던 나였지만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았다. 직장 내 괴롭힘은 노동자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번쯤은 고민거리로 다가왔을 문제이고 나 역시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40대 초 늦은 나이에 대학이라는 온실을 나와 잠시 일했던 어느 기관에서 나는 유능하고 성실한 직원이 상사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모욕당하고 회사를 떠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그런 나를 못마땅해 하는 상사로 인해 나 역시 내몰리듯 사표를 내야 했고, 그때의 기억은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어렴풋하지만 지우지 못한 상처로 남아 있다. 


권력자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한 이에게 주어지는 정신적·육체적 모욕과 학대는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회사의 노무관리 전략으로 행해지는 노동자에 대한 불이익과 차별, 폭력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가? 노동조합이 있다면 그것을 통해 해결해 나갈 수 있겠지만, 노동조합원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불이익과 탄압은 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2014년 전후로 KT에서 직원의 1/4을 집으로 돌려보낸다는 신문기사를 읽었을 때 나는 의아했다. 집으로 가라고 해서 사람들이 순순히 그 말을 들을까? ‘희망퇴직’, ‘명예퇴직’이란 기만적인 이름으로 포장된, 몇 푼을 더 얹어준 보상을 받고 ‘기꺼이’ 회사를 떠나줄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의 의문은 〈KT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 보고서〉라는 용감한 이들의 노력을 접하면서 다소 풀렸다. 직장을 떠날 수 없는, 떠나지 않으려는 많은 노동자들이 어떤 곤경에 처하고 어떤 모욕을 감수해야 했는지,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뎌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직장 내 괴롭힘이란 무엇인가


2015년 사무금융노조의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는 내가 가진 트라우마와 의문 속으로 한걸음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KT 조사팀을 주축으로 구성된 연구진의 첫 모임에서 우리는 ‘직장 내 괴롭힘이란 무엇인가’라는 기본 정의에서부터 실태조사를 위한 설문지 구성, 그리고 ‘직장 내 괴롭힘’이란 이름의 적합성까지 논의했다. A부터 Z까지 다시 고민한 셈이다. 그러나 보고서 작성 이후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다. 정의 이전에 명칭도 아직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최근 ‘일터 괴롭힘’이란 말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공식용어로 인정된 것은 아니다. 또 직장 내 괴롭힘의 가해자와 피해자 범위도 복합적이다. 상사, 동료는 물론 고객까지 가해자가 될 수 있으며, 개인뿐 아니라 집단 모두 가해자나 피해자가 된다. 무엇보다도 직장 내 괴롭힘은 회사의 노동 통제 전략일 수 있는데, 이 경우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가해의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조직에서 권력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통제할 때, 법적 테두리를 넘어 그들의 전략을 밀어붙일 때,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일방적인 요구와 힘을 행사할 때 직장 내 괴롭힘은 발생한다. ‘소비자는 왕’인 사회에서 고객이 노동자에게 무릎 꿇는 사과를 요구할 때도 발생한다. 몇 해 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땅콩 회항 사건’이나 ‘컵라면 상무 난동 사건’ 등 항공사 승무원들이 겪었던 갑질 문화가 전형적인 예다. 그러나 이런 예들은 일회성일 수 있고(물론 땅콩 사건의 주인공인 상사는 회사에서 갑질 사건을 종종 일으켰을 수 있지만), 개인적인 괴롭힘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회사의 노무관리 전략으로서 행해지는 직장 내 괴롭힘이다. 구조조정을 목적으로 인력을 감축하고 싶을 때, 노동조합 조직이나 활동을 억제하고 싶을 때, 실적 경쟁을 통한 성과 관리 전략으로 회사는 특정 종업원들을 지목하고 분리하고 교육이나 상담 등 이런저런 프로그램들을 실시한다. 그 결과는 노동자의 퇴사일 수도 있고, 노동조합 탈퇴이거나 더 많은 실적 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떤 것이든 공통된 사실은 노동자의 고통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스트레스, 우울감이나 공황장애, 대인 기피증 등 심리적 손상은 물론, 신체적 통증을 수반하기도 한다. 자존감의 훼손과 신체적 질병이 직장 내 괴롭힘의 의도한 또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며 견디지 못한 노동자 중에는 스스로 자기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다.  


직장 내 괴롭힘 양상


사무금융노조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나는 인터뷰조사를 수행했다. 당초에는 피해자를 만나 사례를 수집하고자 했으나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꺼려해(2차, 3차 피해의 위험이 있으므로), 결국 노동조합 간부들의 직·간접적 경험을 듣는 것에서 만족해야 했다. 인터뷰 결과 사무금융노조 산하 기업에서 일어나는 직장 내 괴롭힘은 대개 아래 표와 같은 양상으로 나타났다.

표-한울림.jpg

얼핏 봐도 사람이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 수많은 괴롭힘들이 나열돼 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나 존재한다는 ‘일진’이나 할 법한 행위들이다. 여기서 내가 가진 또 하나의 의문은 ‘과연 가해자의 정신은 온전할까?’ 하는 것이다. 폭력의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치료와 교정이 필요하듯이, 직장 내 괴롭힘의 가해자들 역시 자신의 마음과 몸이 망가져 갈 텐데, 그렇다면 이런 괴롭힘의 결과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생각해 봐야 한다. 직장 내 괴롭힘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동시에 인격적으로,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파괴시킨다. 또 직접적 당사자가 아닌, 주변의 목격자들에게도 심리적 손상을 초래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무한 반복되는 ‘의자놀이’와 연대의 실종이다. 인터뷰 조사에서 발견된 사실 중 하나는 직장 내 괴롭힘과 관련된 암묵적인 동의의 구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인력 감축을 목적으로 한 괴롭힘의 경우 누군가의 퇴직은 나의 승진기회를 늘릴 수 있고, 결국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의자놀이(공지영 소설, 의자를 뺄 때마다 사람이 사라져야 하는 놀이)가 될 수 있다. 경쟁 압박을 내면화한 노동자들이 직면한 가혹한 현실이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을 깨고 피해자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갈 수 있다. 조사 대상 증권회사 노조 간부의 인터뷰에서 회사의 퇴직 압력에 저항하던 한 노동자가 동료들의 따돌림이 시작된 후 자살하고 말았다는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칼바람 부는 구조조정 일터에서 노동자를 버틸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이 연대였다면, 직장 내 괴롭힘은 이런 연대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 연대만이 희망인 일터에서 동료들의 지지를 잃은 노동자를 버틸 수 있게 하는 것은 없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한 법률이 속히 제정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무금융노조의 실태조사에서 “일도 바쁜데 이런 조사를 하냐”는 반응이 더러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내가 겪고 있는 이 상황을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불러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다. 내가 그 피해자인지 또는 가해자가 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 피해자와 가해자의 증언들, 그것이 가져오는 삶의 파괴 등에 대한 고백과 토론이다. 적당히 법 하나를 만들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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