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여성 노동] 누구를 위한 일·가정 양립인가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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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인 센터 정책부장



남성우월주의적 편견


‘예전에 내가 갖고 있었던 남성우월주의적 편견을 생각해 보면, 그 편견 안에는 여성에 대한 경멸,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한 경멸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에서 하등인간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겪는 가장 가혹한 처벌이라 할 수 있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의 한 대목이다. 여성이 일터에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 특히 어려운 문제는 임신과 출산이다. 출산하고 돌아올 수 있는 일자리인지, 퇴사를 종용받는 건 아닌지, 여성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고 걱정할 만한 문제다. 아니, 임신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건 고민과 걱정의 수준을 넘어 불안과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2015년 한 복지관에서 육아 휴직을 하고 돌아온 사회복지사가 둘째 아이를 임신하자, “가임기 여성은 다 잘라야 한다”는 상급자의 발언으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상급자의 발언이 부적절했지만 사회복지사는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다. 이후 사회복지사는 죄송하다고 사과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한다고 했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전개다. 임신을 이유로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건 군사 문화를 쏙 빼닮은 남성 중심적인 직장 문화에서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어떤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스며들면 그것은 문화가 된다. 우리 사회는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거스르는 생각이나 행동을 상상할 수 없게 됐고, 그러한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배척한다. 피해자인 사회복지사가 먼저 사과를 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서점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임신을 했고, 책을 여러 권씩 들고 옮기거나 사다리를 타고 책장 높은 곳에 정리하는 작업이 위험한 것 같아 관리자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 근로 기준법은 임산부가 연속적으로 중량물을 취급하거나 추락 위험이 있는 곳에서 작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이는 해고됐다.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 맞게 표현하면 임신 초기라 위험하니 집에서 쉬는 게 어떻겠냐는 관리자의 권유에 승낙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권유와 승낙을 해고라 규정했지만, 그이는 배가 불러오면 어차피 그만둬야 할 거 관리자에게 축하와 배려를 받으며 몇 달 일찍 그만둔 것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의 대목을 인용한 것은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실제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하등’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남성우월주의적 편견이 남성 중심적 문화를 만들고 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편견을 경험하는 편견의 피해자면서 편견을 재생산하는 주체가 되었다. 결국 사회복지사에게 부적절한 발언을 한 상급자나, 임신한 노동자를 해고한 서점 관리자가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질문을 하나 던져보고 싶었다. 여성이 많은 조직은 다르지 않을까?


여성이 많다고 다르지 않았다


2014년 센터가 노원지역에 종사하는 보육교사를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성 노동자가 100퍼센트지만, 그 중 출산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42.4퍼센트에 그쳤다. 출산 휴가는 근로 기준법 제74조에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강행규정이다. 그럼에도 출산 후 일자리에 복귀했거나 할 수 있다는 응답은 35퍼센트에 불과했고 나머지 65퍼센트는 퇴사를 당하거나, 자발적으로 퇴사하도록 암묵적 압력을 받거나, 스스로 일자리를 떠나는 등 일자리에 복귀할 수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영유아를 보육하는 보육교사의 출산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었다.


또 다른 대표적 여성 직종으로 사회복지사가 있다. 센터는 전국 사회복지기관으로부터 수거한 262개 취업 규칙이 근로 기준법과 남녀 고용 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남녀 고용 평등법)의 여성 관련 조항 45개를 반영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분석변수인 여성 관련 조항 45개는 차별, 성희롱, 출산, 육아, 임산부 등에 대한 내용이다. 물론 취업 규칙에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근로 기준법과 남녀 고용 평등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법 내용을 충분히 명시하고 법 이상의 추가적인 권리를 담고 있는 경우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노력으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사회복지기관이 대부분 영세한 규모이거나 업무 내용 상 근로 감독이 미비하고 노동조합이 부재하기 때문에 노동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45개 항목 모두 충분히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복지사의 압도적 다수가 여성인 점을 감안하면 여성에 대한 노동권 보장은 전체 종사자에 대한 권리 보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때문에 취업 규칙이 여성 종사자의 권리를 얼마나 보장하고 있는지 관리·감독하는 것은 개인의 인권과도 연결되어 있는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질문의 대답은 ‘다르지 않았다’이다.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해졌고 동등한 사회구성원이라는 인식이 확산됐지만, 남성 중심적인 직장 문화는 여전히 존재한다. 게다가 출산과 육아는 여성이 전담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성역할 구분이 거리낌 없이 통용되면서도 정작 일과 출산·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조건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보육교사와 사회복지사 사례를 통해 여성이 많은 조직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포스터.jpg

고용노동부 일·가정 양립 지원제도 홍보 포스터



누구를 위한 일·가정 양립인가


여성은 일터에서나 집에서나 온전한 개인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부수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당선 직후부터 고용률 70퍼센트를 달성하겠다며 일·가정 양립을 위한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확산시켰다. 아르바이트로 대표되는 기존의 시간제 일자리는 임시적 성격의 일자리라는 부정적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시간선택제 공무원을 채용하면서 공무원 보수 규정에 따라 급수와 호봉을 동일하게 하고 정년을 보장하며 각종 휴가와 수당, 승진 기회를 보장하는 등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이 여성 고용과 일·가정 양립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 장담했다. 2014년부터 채용이 시작된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정부 취지와 다르게 고학력, 고스펙자가 몰리기 시작했다. 평균 연령도 30대 초반으로 낮은 편이었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층이 상대적으로 경쟁률이 낮은 시간선택제 공무원에 지원했고, 시간선택제로 일하면서 ‘정상적인’ 취업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애초 취지에 맞게 일·가정 양립이 필요한 여성이 주로 응시하고 채용됐다고 해도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통해 여성이 동등한 사회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시간 비례 원칙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고 승진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은 언뜻 합리적인 것 같지만, 임금은 전일제 공무원의 절반이고 승진은 두 배의 기간을 더 일해야 할 수 있다. 게다가 야근을 불사하는 장시간 노동으로 업무에 대한 헌신과 노력 정도를 평가하는 기존의 관행대로라면, 아무래도 시간선택제 공무원에게 불이익이 있을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시간선택제 일자리의 취지 이면에는 일·가정 양립이 여성에만 국한된 문제라는 인식이 전제되었다는 점이다. 이대로라면 여성은 시간제 일자리에서 저임금으로 일하고 퇴근 후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까지 도맡아야 한다. 이러한 정책은 남성 중심적인 문화와 성역할 구분을 오히려 고착화시킬 수 있다. 남성우월주의적 편견을 극복하지 못한 정책의 비극적 결말이다.


노동운동계의 성평등 수준


노동운동계에도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있다. 주제와 무관하게 토론회 패널은 대부분 남성으로 구성되고,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 대표들은 남성이 압도적이다. 우스갯소리로 노동 운동에도 유리천장이 있다고 말할 정도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여성이 ‘하등’한 존재여서가 아니다. 남성 중심적인 문화 때문에 토론회 패널을 구성할 때 남녀 성비를 고민해보지 않았고, 성역할 구분 때문에 여성이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박탈당했을 수 있다. 남성 중심적인 문화와 성역할 구분이 톱니처럼 맞물린 결과, 노동운동계의 성평등 수준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2.성평등.jpg

여성들의 고충을 적은 포스트잇


대안


스웨덴에서 여성이 육아 휴직을 하면 남편은 의무적으로 2개월 이상 육아 휴직을 가야 한다. 육아 휴직을 주로 여성이 쓰고 있는 것의 대안으로 남성에게 육아 휴직을 의무적으로 부여한 것이다. 물론 유급이다.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 육아 수당과 공공보육 등 일하는 부모를 위한 보편적 복지를 제공하는 스웨덴은 불평등이 심화되면 경제 성장도 둔화될 거라는 전제 하에 노동 시장 정책을 구상했다. 스웨덴에서 경제 성장은 복지 국가를 만드는 기틀이 되고, 복지 국가는 생산성과 사회적 효율성을 동시에 높였다. 스웨덴 사례가 보여주듯이 성평등 정책은 어느 한쪽 성별에만 유리한 정책이 아니다. 노동 시장 성과의 원동력이자 경제 성장과 복지 국가의 기틀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현재의 일·가정 양립 정책이 남성 중심적 문화와 성역할의 구분을 더욱 고착화시킬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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