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여성 노동] 우린 설국열차 마지막 칸이에요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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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지운 여성학 연구자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임흥순 감독의 다큐멘터리 <위로공단>(2014)에 등장하는 과거와 현재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은 가상의 공간에서 서늘하게 등장하는 다양한   ‘유령’의 이미지와 교차된다. 숲속 산길을 헤매는 자매의 뒷모습, 앳된 언니는 막내를 들쳐 업고 험준한 산길을 걷는다. 마지막 컷에서 다시 그 길을 걷는 돌봄 노동자의 손과 어느 여성 치매 노인의 손은 연결되어 있다. 현실과 현실이 아닌, 잊혀진 또는 숨겨진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불안한’ 삶과 노동을 통해 그녀들은 연결되어 있다.


2015년 공공운수노조 서경지부 집단 교섭 과정에서 한 여성 청소 노동자는 내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우린 설국열차 마지막 칸이에요.” 영화 <설국열차>(2013)의 마지막 칸은 기차에 탈 수 없었던 계층, 또는 계급의 특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된, 인간적인 삶을 담보 받지 못하는 공간이다. 비정규직 여성, 특히 청소 노동자의 투쟁이 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을 상징한다면, 그곳에서 인권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한국의 비정규직 투쟁 현장은 물론 영화만큼 어둡지 않다. 2011년 홍대 청소 노동자 투쟁의 희열, 학교비정규직 돌봄 노동자 조직의 성장, 서울시 콜센터 노동자의 직접고용 투쟁 등의 사례는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KTX 여승무원들의 지난한 투쟁, 학습지노조 재능교육 지부의 와해, 최근 드러난 김포공항 청소 노동자들의 인권 유린 현실은 한국의 비정규직 특히, 여성들이 집중된 노동 현장에서의 인권, 노동자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 설국열차의 혈투만큼이나 힘든 싸움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투쟁은 일반의 계급 투쟁과 다른 걸까?


1.설국열차.jpg

영화 <설국열차>에 나오는 꼬리칸 모습


신 국제 노동 분업과 70년대 민주노조의 형성


우선, 자본과 노동의 관계로 문제를 살펴보면, 한국 자본은 1960~70년대 수출 주도 산업화 전략을 통해 글로벌 생산에 참여하며 축적을 거듭해 왔다. 서구 근대 국가의 산업화 과정과 달리, 한국은 신 국제 노동 분업1) 즉, 제3세계의 값싼 여성 노동력에 기댄 글로벌 생산 전략에 편입되어 성공적 개발 국가 대열에 올라선다.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투쟁은 그러한 국가의 자본 축적 전략에 대한 투쟁이자, 저임금 여성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동원된 가부장적 통제와 성별 위계에 대한 조직적 저항이었다. 동일방직, YH무역, 원풍모방 투쟁에서 벌어졌던 여성 노조원들에 대한 경찰 권력과 어용 노조 탄압이 그 대표적 예다.


87년 이후 민주노조 성격


1987년 노동자대투쟁 결과로 민주노총 전신인 전국노동자협의회(1990)가 구성되며 민주노조는 새로운 정체성을 지향하게 된다. 유신정권을 거치며 성장한 소수 재벌 중심 자본은 중화학 공업 산업(철강, 조선, 기계, 석유) 육성에 집중하며, 70년대와 대비되는 남성 숙련 노동력에 기댄 축적을 거듭한다. 87년 이후 민주노조는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성격을 벗어나 전투적 남성 숙련 노동자 중심의 노동조합으로 재편된다. 이 과정에서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이 주장했던 가부장적 국가와 자본 통제에 대한 저항 의식은 탈락한다. 다시 말해, 한국의 재벌 자본 형성의 밑거름이 되었던 강력한 성별 분업에 의존한 자본 축적의 모순은 90년대 민주노총 의제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민주노총과 분리하며 등장한 여성 노조들은 여성 집약 직종을 중심으로 별도의 투쟁을 전개한다.


한국의 신자본주의는 80년대 중반 글로벌 자본의 요구에 따라 정부가 서서히 민간자본에 대한 통제를 풀며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2) 이는 1997년 한국에서의 IMF 위기를 낮은 단계로 진행되던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급물살을 타게 된 계기로 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 핵심은 자본과 노동의 균형에 기반한 복지 국가 모델을 버리고, 철저히 자본의 힘으로 움직이는 국가 모델을 지향하는 것이다. IMF 위기 이후 자본 권력이 운영하는 국가 시스템 구성을 위해 한국 정부는 강력한 노동 탄압 정책을 추진해 왔다. 


한국 비정규직화의 사회적 조건


90년대 말 정부와 자본의 공조로 탄생한 ‘비정규직’은 다름 아닌 노동조합 조직을 통해 자본에 대항해 싸울 수 없는, 때론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조차 불릴 수 없는, 새로운 하위 계층의 구성을 의미했다. 내가 집중하는 점은 서구 선진국가의 ‘불안정 노동(precarious work)’ 흐름과 달리, 한국의 비정규직화는 법과 제도를 통해 매우 짧은 기간 내에 구성되어 정규직과 구분되는 새로운 계층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3)


이를 가능하게 한 사회적 조건으로, 한국의 강력한 성별 분업, 학벌주의, 연령 및 인종 차별 등 오랜 기간 형성된 사회적 차이와 위계가 국가와 자본의 신자유주의 노동 전략에 핵심적 자원이 되었다고 본다. 87년 이후 형성된 남성 정규직 중심의 조직 노동은 이러한 사회적 위계를 계급 투쟁의 일환으로 보지 않았다. 여전히 정규직 노조 투쟁과 비정규직 투쟁이 평행선을 달리는 근본적 원인은 대부분의 비정규직 투쟁이 단순한 계급 투쟁 성격을 벗어난다는 점에 있다.


변화하는 사회적 노동 분업


미국의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지적하는 열일곱 가지 자본 모순 가운데 핵심을 이루는 내용이 자본과 노동 간의 모순, 그리고 변화하는 노동 분업에 관한 것이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원론적 모순만으로 현대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기술적 노동 분업 보다 더욱 강력하게 노동자 계급을 분화하고 있는 것이 사회적 노동 분업이라고 지적하는데, 이는 한국의 비정규직화 경향을 설명하는데 유용하다.4) 성별, 연령(즉, 생산적 신체), 인종, 학벌, 성적 지향, 장애 등 ‘사회적으로 구성된’ 차이가 노동 시장 분화에 핵심 자원이 되고 있는 거다. 정부 주도의 개방과 구조개혁 정책은 자본이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 요소를 자원화 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한다. 비정규직을 법제화함으로서 단기, 임시, 파견, 간접 고용이 사회적 신분을 가르는 효과적 장치로 기능해 왔다.


자본의 재생산 vs 사회적 재생산


나는 2015년 서경지부 집단교섭 과정을 지켜보며, 70년대에 꽃다운 청춘을 섬유, 가발, 전자제품 조립공장에서 일하며 노동 시장에 뛰어든 여성들이 30~40대가 되어 다양한 불안정 노동(가정 부업, 화장품 판매, 대형 마트 판매직, 노인 수발)을 거쳐 청소 노동자가 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는 한국의 자본 축적 핵심 자원인 성별 분업, 즉 사회적 노동 분업이 변화해 온 과정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녀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온 인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왜 이 힘든 싸움을 이제야 하시나요?”라는 질문에 지금 50대 60대가 된 그녀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자식들이, 손주들이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으며 사는 사회가 되길 희망한다”고. 노조와 언론이 대변하는 생활 임금 의제를 넘어, 그녀들의 의식은 노동하는 모든 인간이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 받는 사회로 변화하는데 맞닿아 있었다. 나는 이를 하비가 말하는 자본의 재생산과 모순 관계에 있는 사회적 재생산에 관한 그녀들의 의지로 읽었다.  


설국열차 안에서 누가 인간인가?


인권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면, 여성의 인권과 노동권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환경이 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이라면 불가능하다. 희망은 있다. 열차를 멈추거나, 탈출하는 것이다. 그 엄청난 위계와 폭력을 통해서만 인간적 삶과 생산이 가능하다는 광신을 버리면 된다. 다른 삶의 방식과 생산의 관계를 상상하면 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 “누가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 과연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이 노동 현장에서, 가정에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주디스 버틀러는 인권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인간’의 범위를 끊임없이 확장하는데 있다고 했다.5) 바꿔 말하면, 한 사회의 ‘인권’은 체제와 제도의 혜택을 받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다양한 층위의 구성원들 간의 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재고되어야 하는, 성숙한 사회적 관계를 위한 인식이다. 이에 더해, 버틀러는 철학적 제안을 한다. ‘나’라는 주체를 구성하는 지식의 한계를 인식해야 하며 이를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타자와 만나야 한다고. 그 만남 없이는 인권 논의에서 어떠한 변화도 진보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6) 여기서 만남은 다양한 사회적 특권의 해체 과정을 의미한다.7) 


이성애중심주의의 한계8)


같은 맥락에서, ‘여성 인권’이라는 질문이 가진 한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인권을 여성이라는 남성과 대비되는 차이를 통해 구성하면 여전히 여성/남성으로 이분화된 이성애정상성에 갇히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이성애중심주의는 공적·사적 영역에서 강력한 성별 분업을 가능하게 하는 기제이다. 최근 알바노조의 투쟁 현장에서 ‘젠더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라!’는 문구를 매우 인상 깊게 봤다.9) 한국 사회 일반이 일터에서 여성답게 행동하고 여성다운 복장을 착용하라고 하는 것이 폭력이라는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의식과 인권 의식의 관계


다시 영화 <위로공단>으로 돌아가면, 스튜어디스들이 겪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 젊은 여성은 말한다, “화려한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한번 사는 삶을 진실되게 살고 싶다.” 여기서 ‘화려한 껍데기’는 그녀를 예쁜 인형 정도로 취급하는 노동 현실이고, ‘진실된 삶’은 인간적 관계 회복에 대한 의지로 읽을 수 있다. 노동관계를 통해 자행되는 성(sexual)적, 신체적, 감정적 통제와 학대는 노동자로 하여금 인간적 삶의 토대를 상실하게 한다. 노동하는 육체가 소비의 대상인 상품으로 전락해 자본의 탈을 쓰고 유령처럼 사회를 잠식한다. 나의 인간적 삶이 타인의 비인간적 노동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의식을 불가능하게 하는 자본의 힘이다. 사회적 관계에 기반한 자본주의 생산 양식을 재고하는 노동자 의식은 인간적 삶을 확장하는 인권 의식과 분리가 불가능하다. 시장과 자본이 주도하는 차이와 차별을 통해서 끝도 없이 내달리는 (한국)열차의 삶과 생산 방식을 멈추는 힘은 어디서 시작될까?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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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 국제 노동 분업(New International Division of Labor)은 60년대 독일, 미국 자본이 제3세계 저임금 여성 노동력을 찾아 개발 국가들로 생산 공장을 이전한 현상을 일컫는데, 이는 70년대 한국, 대만,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중국, 동남아시아 국가, 멕시코 국경 마킬라도라, 캐리비안 국가들을 거쳐 현재 아프리카의 국가들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


2)   Pirie, Iain. The Korean Developmental State: From Dirigisme to Neo-Lib-eralism. Routledge Studies in the Growth Economies of Asia 73.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08.


3)   불안정 노동자들이 의식을 형성하지 못하는 ‘위험한 계급’이라는 주장(Guy Standing 2011)과도 한국의 비정규직 운동은 궤를 달리해 왔다.


4)   데이비드 하비 《자본의 17가지 모순》 (동녘, 2014)


5)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문학과지성사, 2015)


6)   여기서 한국 사회의 주체를 구성하는 지식의 예를 들면, 남성/여성, 한국인/외국인(이주 노동자), 이성애/동성애, 정상인/장애인 등. 이에 더해 정규직/비정규직 차이의 구성은 앞의 예들을 모두 포함하는 제도적 차별 메커니즘으로 기능해 왔다.


7)   생물학적 차이로 백인/흑인을 구분해 인종 차별을 옹호하며 미국의 식민 노예 자본주의를 떠받든 우생학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8)   이성애중심주의 또는 이성애정상성은 여성/남성의 생물학적 차이에 기반한 사회적 성역할(여성성/남성성)이 고정불변하다는 믿음이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성애를 사회적 규범(norm)으로 설정하고 강력한 이분법적 성역할과 위계적 관계를 강제한다.


9)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노동권팀의 구호


10)   한국 사회를 설국열차에 비유한 노동자의 통찰은 한국 사회의 압축(compressed) 성장에 이은 복식(compound) 자본 축적의 경향에 대한 가설을 제공한다. 설국열차의 질주는 그 속도를 유지하도록 고안된 엔진에 의존하며 노쇠한 부품을 대신할 인간의 신체가 엔진의 존속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모순이 드러난다. 즉, 엔진의 존속과    (특정 계층의) 인간적 삶이 공존할 수 없는 상황.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의 복식 축적 또는 지수(exponential) 축적의 경향성을 ‘위험한’ 모순으로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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