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작은 시작이다

by 센터 posted Oct 21, 201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Files

sorrow.jpg


“지난겨울 임신한 여자를 알게 됐다. 겨울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임신한 여자…. 그녀는 빵을 먹고 있었다. 하루 치 모델료를 다 주지는 못했지만 집세를 내주고 내 빵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눠지고 있어.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주는 힘 아니겠니? 그녀의 이름은 시엔(Sien)이다.” 
“그녀에게 특별한 점은 없다. 그저 평범한 여자…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숭고해 보인다. 평범한 여자를 사랑하고 또 그녀에게 사랑받는 것은 행복하다. 인생이 아무리 어둡다 해도….”

 -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것 같은 이 여인이 바로 고흐가 사랑한 여자 시엔이다. 1995년 나 홀로 유럽 여행 중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 있는 이 여인을 처음 마주했을 때 ‘슬픔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신선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2년 후 1997년 다시 시엔을 찾아갔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고흐는 불행한 시엔의 아픔까지도 사랑했다고.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실루엣은 나올 수가 없다. 그 후 한참이 지나 2007년 다시 그녀와 마주했다. 궁금해졌다. “당신은 저 착한 남자의 따스한 사랑이 얼마만큼 위로가 되었나요?” 이렇게 묻곤 울컥했다.
시엔은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고단한 인생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밑바닥, 혹독한 운명의 굴레 속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이 착한 남자의 사랑만이 살아가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림 속 시엔이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을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알게 되었다. 힘겨운 삶에 지쳐 버린, 슬픔이 가득한 엄마의 몸에 기대어 새로운 생을 준비하는 한 생명이 꿈틀대고 있었다. 시엔에게는 이미 아이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한 생명을 또 품었다는 것이 시엔에게 살아가야 하는 힘이 되었을까, 아니면 신마저 원망하고 있었을까.
고흐는 시엔을 모델로 60여 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다. 그 중에서도 〈슬픔〉이란 작품은 고흐가 그린 최초이자 최후의 누드화이다. 고흐는 시엔을 대상으로 한 이 작품 외에는 어떠한 누드화도 그리지 않았다.



글|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5 '어떻게 늙을 것인가' file 센터 2020.08.24 555
54 2022 서울 이동/플랫폼 노동 사진 공모전 당선작 file 센터 2022.08.29 70
53 ‘가장 나쁜 평화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 file 센터 2017.08.28 2358
52 ‘너’라는 위대함을 믿는다. file 센터 2023.12.01 40
51 ‘예술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file 센터 2023.09.11 67
50 ‘우리 모두 함께해야 한다’ file 센터 2021.06.23 156
49 ‘화가’가 아닌 ‘배우’가 죽었다 file 센터 2016.06.27 1817
48 “내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file 센터 2018.11.01 1783
» 〈슬픔〉은 작은 시작이다 file 센터 2014.10.21 5266
46 그가 그립다 file 센터 2016.04.28 2699
45 기록의 힘 file 센터 2024.01.17 41
44 기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file 센터 2022.04.25 629
43 기적 file 센터 2016.01.26 1697
42 꽃이 없어 이것으로 대신합니다 file 센터 2015.03.03 3034
41 나는 누구인가? file 센터 2018.04.26 1912
40 나아지는 걸 축하합니다 file 센터 2021.02.24 1002
39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file 센터 2015.12.02 3804
38 노동에 대한 숭고한 시선_조나단 브로프스키 <해머링 맨> file 센터 2019.06.25 1889
37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가? file 센터 2022.10.31 41
36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file 센터 2015.04.13 1785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Next ›
/ 3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