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분수처럼

by 센터 posted Apr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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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금지.jpg


개나리 꽃망울 터지듯 와글와글 피어나던 아이들 웃음꽃이 더는 광장에 없다. 솟구치는 분수를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아이들 뒤꽁무니를 쫓다 그만 포기해 버린 엄마 아빠의 걱정 섞인 외침이 들리지 않는다. 4월이면 시간표 따라 어김없던 일인데, 기약 없는 일이 됐다. 언젠가 잘게 부서진 물방울이 낮은 햇볕 머금어 무지개가 뜨면, 갖은 색깔 옷차림 아이들이 그 아래를 우당탕 뛰었다. 그리고 지금 잿빛 돌바닥엔 도심 내 집회 금지를 알리는 알림판만이 바람을 견딘다. 기약 없는 분수를 정비하느라 한 시설관리 노동자가 허리 굽혔다. 새로운 일상은 예고도 없이 스몄다. 전문가들은 앞다퉈 닥쳐올 경제 위기를 예고했다. 바닥에선 이제 아우성이 솟구친다. 해고 금지 팻말 든 사람들이 광장 언저리에서 이미 닥친 현실을 증언했다. 언젠가 그 바닥의 분수처럼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옛날이야기

by 센터 posted Feb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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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거짓말.jpg


아이가 한 번씩 뻔한 거짓말을 한다. 곧장 타이르기는 피하고 싶었으니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시간이다. 그러니까 옛날에 말이야 양치기 소녀가 있었는데···. 두어 번은 잘 듣더니 금세 지겨운 모양이다. 벌거벗은 임금님과 피노키오 이야기로 돌려막았다. 거짓말은 나쁘다는 걸 알려 주는 맞춤형 이야기들이다. 얼마간 효과가 있었다. 일하며 찍은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 놓고 정리하는데, 피노키오를 알아본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이게 뭐냐고 물었다. 글 읽는 아이 앞에서 거짓말로 둘러댈 수도 없어 우물쭈물 설명하는데 쉽지가 않았다. 기다란 코에 적힌 노동기본권 보장이며 비정규직 제로시대 같은 것들을 말해주느라 새로운 피노키오 이야기를 지어내야만 했다. 일하다 죽은 사람들 이야기에 이르니 이어 가기가 버거웠다.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아니었으니 더욱 그랬다. 여러 처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켜지지 않아 거짓말이 돼버린 약속을 줄줄이 읊었다. 촛불 행진을 선언했다. 생선 굽느라 켜둔 촛불을 보고도 광화문광장 구호를 떠올리는 아이가 저기 사진 속에 적힌 촛불 행진에 관해서도 물었다. 그때와는 좀 다른 이야기지만 같은 것이기도 하다며 혼잣말을 하고 말았다. 옛날 옛적에 사람들이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는데···. 훗날 광장의 촛불 이야기는 어떤 교훈을 품게 될까 생각해 봤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겨울, 거울

by 센터 posted Ja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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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거울.jpg


거기 액자에 김용균 아닌 누가 들었대도 이상할 것 없는 세상의 광장에서 운이 좋아 죽지 않은 그의 동료가 유행 지난 롱패딩을 입고 서성인다. 비질하고 꺼진 촛불에 불 놓아 살린다. 꺼지지 않는 향에서 연기 오르는 동안 회색빛 재가 툭툭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쌓여 간다. 어느새 수북했다. 철을 모르고 싱싱한 국화가 또한 그 앞에 쌓였다. 뒷벽에 빼곡하게 붙은 온갖 추모의 글은 사진을 인쇄해 붙인 것이니 진짜가 아니었다. 수년 전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붙은 접착식 메모지는 지금 다른 이의 영정 뒤에 병풍처럼 붙어 묵은 추모를 새롭게 이어 간다. “당신의 죽음은 사회구조적인 죽음입니다.”라는 말이 다만 진짜였다. 달라진 것 없는 죽음 뒤에 붙은 추모 문구가 달라질 리 없었다. 촛불이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외투 주머니에 손 넣은 채 잔뜩 움츠린 사람들이 그 앞 횡단보도를 끝없이 오갔다. 거기 누가 들어도 어색할 것 없는 영정 액자에 빛 들어 수은주 새겨 넣은 등대 조형물이 비친다. 김용균을 처음 발견한 동료가 이불 같은 점퍼에 손 넣은 채 죽음 옆자리에 머문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사라져야 할 것들

by 센터 posted Oct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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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처럼.jpg


한때 크고 무거운 카메라와 렌즈는 기자증을 대신하곤 했다. 공연장이나 공사 현장에서 형광 스태프 조끼가 그러했듯 말이다. 좋은 촬영 조건을 찾아 무대에 거리낌 없이 오른 건 대개 큰 카메라였다. 스마트폰은 눈치를 살펴 주저했다. 오랜 관습이었으나 곧 뒤집어질 구습이기도 했다. 누구나가 찍는다. 저마다의 언로를 가진 사람들은 이제 대형 집회 무대에 거리낌 없이 올라 스마트폰과 태블릿 피시와 소형 캠코더로 찍는다. 생중계한다. 시청자와 독자를 지닌 미디어는 적어도 그 자리에서 눈치 보지 않고 과감했다. 주최 측은 1인 미디어를 차별하지 않았다. 기자만이 찍고 알린다는 건 낡은 질서에 들었다. 사법적폐 청산을 외치던 촛불집회엔 구호가 다양했는데, 그중 언론 개혁 팻말이 적지 않았다. 기레기 표현이 잦았다. 엘이디 촛불을 든 사람들이 크고 무거운 카메라 든 기자들에게 똑바로 하라고 질책했다. 드론이 날아 담은 촛불 파도 영상이 무대 위 유튜브 생중계 화면에 흘렀다. 천박한 구시대 유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고 최후통첩에 적었다. 무대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곧 사라졌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맨 앞자리에서

by 센터 posted Aug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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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jpg


진상은 낯설지 않았다. 이미 구호에 들어 오래 외친 말들이 화면에서 흘렀다. 위험은 아래로 아래로 흘렀다고 발표자가 말했다. 하청 또 재하청을 복잡한 사슬을 타고 흘러내렸다. 맨 앞자리에서 지켜보던 엄마 눈에서 물이 흘렀다. 마르질 않았다. 돈 때문이었음을 조사 결과는 말해줬다. 분할되고, 외주화된 공정에서 새로운 위험이 발생했다고도 조사위는 지적했다. 청년 노동자들은 오늘도 거기 일급 발암물질 뿌옇게 휘날리는 곳에서 일한다. 바뀐 게 많지 않다고 앞자리 선 이가 전했다. 엄마는 맨 앞자리에 앉아 두툼한 자료집 구석에 메모를 꾹꾹 남긴다. 울음 꾹꾹 참느라 자꾸만 고개를 떨궜다. 그 앞 화면에 자전거 타고 출근하는 생전의 김용균 씨 사진이 멈췄다.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가 8월 19일 진상조사 결과와 권고안을 발표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맨 앞에 오토바이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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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이런저런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았던 하루, 퇴근길 상념이 짙다. 종일 추적거리던 비가 그치고 저 멀리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빛이 짙었다. 교차로에 빨간불 들어와 급히 멈춰 섰다. ‘신홋발’이 마음 같지 않아 혼잣말이 툭 튀어나왔는데 과했다. 그래도 맨 앞이구나, 되지도 않는 이유 들어 마음 추슬렀다. 동네 친구 집에 맡겨 둔 아이 생각에 급했다. 어느새 오토바이 한 대가 앞자리 섰다. 배달 노동자였다. 중학교 시절 방학이면 신문 배달 알바를 했다. 이른 새벽 지국으로 나가 온갖 광고 전단부터 끼워 넣었다. 책처럼 두툼해진 신문을 자전거에 싣고 한겨울 미끄럽던 골목길을 누볐다. 쓱 접어 슉 던지면 이층집 현관 앞에 착 떨어지곤 했으니 일이 손에 붙을 때였다. 반쯤 돌렸을까, 자전거 바퀴가 펑크 났다. 별수도 없어 끌고 걷고 달렸다. 지쳐 돌아가던 길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다른 신문 지국이었는데, 오토바이 내어준다면서 꾀었다. 확 끌렸지만 거절하고 말았다. 오래전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로 크게 다쳐 병원 생활이 길었는데, 그 뒤로 우리 집에서 바퀴 두 개짜리 차 얘긴 금기였다. 곧 신호가 바뀌었고, 오토바이는 치고 나갔다. 곡예하듯 차 사이 좁은 틈을 비집고 달려 멀어졌다. 신호등 맨 앞자리엔 언제나 배달 오토바이가 있었다. 밥 차리기엔 늦어 배달 앱을 뒤적거렸다.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밤늦도록 집 앞 골목에 울렸다. 쓰는 사람은 많은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고,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이 어느 자리에서 말했다. 만나면 누가 식물인간이 됐다더라, 죽었다더라 얘기를 나눈다고도 했다. 불나방에 비유했다. 노조할 권리 보장을 그 앞자리 정치인과 정부 관료에게 호소했다. 신호가 바뀌었고 맨 앞자리 오토바이가 내달린다. 거기 배달통에 책임과 위험을 가득 싣고, 식지 않은 음식을 나른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오버홀

by 센터 posted Apr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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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화력.jpg


둥글게 말린 컨베이어벨트에 탄가루 잔뜩 앉았다. 손바닥 자국이 찌글찌글 남았다. 사고 현장이다.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회사 사람은 강조했고 들어가기도 힘든 곳이라고, 몸 굽혀 현장 살피던 조사위원은 말했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함께 일했던 동료가 사지에서 증언했다. 그의 안전모엔 이제 멀끔한 헤드랜턴이 붙어 밝았다. 어두운 밤, 굉음을 내며 돌아가던 벨트는 생목숨을 삼키고서야 멈췄다. 주황색 안전제일 벨트가 뒤늦게 그 앞을 막았다. 위험, 접근금지, 회전체 주의, 또 귀마개와 마스크와 보호구 착용을 알리는 온갖 안내문이 탄가루 덮어쓴 채 거기 많았다. 무고장 운전은 우리의 약속이라고 전광판에서 밝게 빛나던 문구가 또한 여기저기 많았다. 중앙관제실 벽에 깜빡거리던 수치는 운탄 벨트와 보일러와 터빈의 현재 상태를 소상히 알렸다. 거기 어딘가에 끼여 부서진 몸뚱아리의 상태를 살피는 항목은 없었다. 무고장 운전일수 목표치와 현재 달성일수를 알리는 전광판이 제일 위에서 밝았다. 발전소는 오버홀, 계획예방정비 공사 중이었다. 일정 주기마다 완전히 분해해서 점검한다. 갑작스러운 고장을 막기 위해서다. 죽음을 막기 위한 대수선 작업이 먼저다. 원죄 깊은 엄마가 호소하느라 여기저기서 바쁘다. 목이 쉰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노래 이야기

by 센터 posted Feb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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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콜텍.jpg


서울 강서구 등촌동 그늘진 골목이 바람길이라 거기 덩그러니 웅크린 천막이 울었다. 현수막이 널을 뛰고 손팻말이 날았다. 미세먼지 가신 하늘이 쨍했다. 해 들지 않는 천막에서 기타 소리가 울렸다. 노래가 따랐다. 모닥불 피워 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4천 390일, 과연 그들의 해고 이야기는 끝을 몰라 티도 나지 않는 끝자리를 하나 더 보탰다. 민들레꽃처럼 살아야 한다. 바람에 홀씨 날려 여기저기 떠다니다 아스팔트 좁은 틈에 뿌리 내리기를 반복했다. 인천 어느 문 닫은 공장 앞에서, 여의도와 광화문에서, 또 여기 등촌동까지 거친 틈에 살았다. 13년, 억세고 질기기로 민들레 못지않았다. 홀로 가는 길이며 또 무슨 흘러간 옛 노래 메들리가 돌고 돌았다. 광야에서, 언젠가 촛불광장의 애창곡도 흘렀다. 스트로크는 불안했고, 코드 옮겨 잡는 손가락이 느렸다. 높은 음은 버거워 가성에 기댔다. 만들 줄은 알았지만 다루는 일이 또 달랐다. 늙어 손가락이 맘 같지 않다고, 기타 연주 6년차 이인근 씨가 말했다. 거리에서 긴 밤 지새우느라 비닐마다 맺힌 이슬이 하나둘 뭉쳐 흘러내렸다. 오래 끌던 문제들이 하나둘 풀리는 걸 보면서 우리도 잘돼야지 싶었다고. 농성 신기록은 도대체가 명예롭지 않은 일이라고 흰머리 긁던 임재춘 씨가 말했다. 그 머리도 한때 검었다. 솔잎처럼 푸르른 시절 다 갔지만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상록수도 거기 낡은 악보첩 어딘가에 들지 않았던가. 다시 돌고,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인가. 다 늙은 기타 노동자의 노래 이야기가 끝을 몰라 하염없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오른다

by 센터 posted Dec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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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비행선.jpg


겨울, 눈이 내리고 사람은 오른다. 바람 잘날 없어 현수막이 운다. 아랫자리 지켜 선 사람들은 목 꺾어 바라보다 몰래 운다. 목재 화물운반대 땔감 삼아 피운 불에 언 몸을 녹인다. 아지랑이 타고 재가 오른다. 줄 따라 보조 배터리가 오르고 빈 것이 내려온다. 두 번째 겨울, 기온은 낮고 사람은 저만치 높다. 연기 오르지 않는 굴뚝을 향해 땅바닥을 기어간 사람들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내려 오질 않는 사람의 형체를 살피던 눈이 붉다. 곡기 끊어 호소했다. 기간의 정함이 없었다. 또 어디 굴뚝 높은 일터에서 맞은 첫 번째 겨울, 스물넷 청년이 늦은 밤 홀로 일하다 하늘로 올랐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팻말 든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남은 사람은 더 이상 죽이지만 말아달라면서 울었다. 향 피워 연기 올랐다. 재 떨어져 향로에 쌓여간다. 고개 떨군 사람들이 촛불을 들어 올린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어느새 훌쩍

by 센터 posted Nov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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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훈.jpg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지난 폭염의 기억이 어느새 멀다. 부쩍 찬바람 불어 사람들 옷차림이 훌쩍 두껍다. 바싹 마른 잎이 길에 뒹군다. 마음 따뜻한 가을 이야기가 청사며 어느 서점 외벽에 붙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오랜 적대의 기억도 얼마간 흐릿하다. 평양냉면 가게엔 단풍이 들도록 줄이 길다. 대동강 맥주 얘기는 호프집 술안주다. 고무찬양에 거리낌 없다. 막걸리 가게도 왁자지껄, 끌려가는 이 없이 평화롭다. 두 정상이 천지에 올라 손잡은 사진이 시청과 지하철 벽 여기저기에 붙어 분위기를 전했다. 훌쩍 가을, 광장엔 온갖 축제가 많아 잔디가 성치 않다. 보수 나선 조경 노동자가 수레를 민다. 축제 무대 설치 알바 나선 청년이 깔개를 끈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된 밥벌이가 또 하루 별일 없이 계속된다. 주름진 얼굴도, 생기 도는 이마도 가을볕에 훌쩍 단풍처럼 익어간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그들이 꿈꾸었던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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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훈.jpg


광장 건너편 낮은 자리에서 가수 박준이 노래한다. 작은 모금함을 앞에 뒀다. 뇌출혈로 쓰러진 LG유플러스 비정규 노동자에 작은 도움 주기를 노래 틈틈이 알렸다. 일어나, 김광석의 노래를 불렀다. 기타를 퉁겼다. 노조 깃발 들고 그 길 지나던 사람들이 습기 머금은 지폐를 통에 넣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가수 박준은 마저 노래했다. 그 앞 집회 무대에서 자신의 노래가 흘렀다. 그 날 선 노랫말 속에 노래 활동가 그들이 꿈꾼 세상이 선명하다. 그 길 지나던 아이들이 낯선 노랫말을 두어 구절 따라 했다. 모자에 온갖 배지 잔뜩 매단 길거리 가수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땀에 젖은 가수 박준이 작은 무대를 정리했다. 뜨겁던 광장에 소나기 한바탕 곧 쏟아졌다. 반가운 비라고 누가 말했는데 해갈엔 부족했다. 되레 습기 잔뜩 몰고 와 숨이 턱턱 막힌다고 사람들은 푸념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파란 나라, 파란 천막

by 센터 posted Jul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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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장7s.jpg

천막에서 살지만, 또 길거리에 떠돈 지 오래라지만 저기 해고자도 한 표 쥔 게 있어 투표했다. 온 나라가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환호성이 터졌다. 약속 읊느라 입이 부르튼 정치인들이 새로운 시작 앞에 포부를 밝혔다. 그게 참 불안하다고, 마음이 편치 않다고 천막 사는 해고자는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 신경이나 쓸까, 걱정했다. 22일째니 파란색 농성 천막은 낡지 않았다. 그 안에 걸린 승무원 유니폼이 꾸깃꾸깃 낡았다. 유행 지난 상의 단추에 철도청 시절의 마크가 달렸다. 싸움은 어느덧 4천일을 훌쩍 넘겼다. 그간 몇 번의 선거를 치렀는지, 또 어떤 농성과 행진과 몸싸움을 벌였는지가 모두 기억에 흐릿했다. 정치인의 묵은 약속이 다만 천막 주변 온 데 걸린 현수막에 선명했다. 포대기에 아이 품은 동료가 큰아이 하원 시키러 떠났고, 남은 해고자들이 또 한 번의 행진을 준비했다. 이리저리 수소문해 찾은 승무원 유니폼을 차려입고 나설 예정이다. 여름, 겨울 것 가리지 않고 모아 10벌 정도다. 청와대를 향한다. 좀 더 가까이 갈 수 없는지를 두고 정미정 씨는 전화기 들고 고민이 깊다. 아직은 잘 맞는다고, 천막에 걸린 유니폼을 보며 김승하 씨가 말했다. 파란 천막을 보았다. 꿈과 희망이 여전히 그 안에 가득하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오랜 구호가

by 센터 posted Apr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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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서비스.jpg


나두식 노조 지회장이 합의서를 살펴본다. 진즉에 문구 한 줄, 토씨 하나 수없이 확인했을 테다. 거기 회사는 협력업체 직원들을 직접 고용한다고, 또 회사는 노조를 인정하고 합법적인 노조 활동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들었다. 오랜 구호였다. 등에 새기고 목청에 새긴 것이었다. 오랜 시간 길에서 뱉은 말이었다. 먼저 간 동료의 유서 내용이었다. 서명 마친 합의서를 다시 살폈고, 스마트 폰 들어 기록했다. 카메라 든 삼성의 홍보팀 직원이 손잡은 노사 대표자의 화기애애한 표정을 주문했다. 굳은 표정의 지회장과 노조 간부들이 잠시 웃었고 찰칵, 기록으로 남았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핫팩처럼

by 센터 posted Feb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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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에핫팩.jpg


그 따뜻하다는 솜 넣은 부츠가 하나 생겨 시골집에 보냈다. 아버지 신으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욕심을 냈다. 원래 이런 건 크게 신어야 한다나. 아이고 어머니, 내 하나 더 사 보낼게요. 겨울 다 지나 늦었을까 걱정했는데 웬걸, 추위가 늦도록 기승이다. 발 따시니 참 좋더라는 전화를 받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진짜 추운 날엔 발끝이 아프다. 여느 집회 사회자 말마따나 투쟁의 열기가 곳곳에 높았으나 손끝, 발끝 아린 걸 어쩔 순 없었다. 핫팩 몸에 붙이고, 손에 쥐고, 발 등에 올려놓고서야 아픔을 덜었다. 이 겨울 누구나가 추웠지만, 칼바람 맞아 시린 사람들이 길에 유독 많았다. 체감온도는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흰옷 입고 앞장선 사람들이 자꾸만 아래로 엎어져 아스팔트에 핫팩처럼 붙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슈퍼맨은 아직

by 센터 posted Jan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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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jpg


해거름, 어린이집 향해 뛰다 걷다 경보하느라 아빠는 숨 가쁘다. 발이 꼬인다. 언 땅을 밟고 허둥댄다. 돌아온 슈퍼맨은 하원 시간 맞추느라 쩔쩔맨다. 슈퍼 가자고 징징대는 아이와 씨름하느라 길에서 떤다. 눈에서 레이저를 쏜다. 아빠 왔다 소리가 제일 반가웠을 아이한테 못할 말을 하고 만다. 코로 먹는지 눈으로 먹는지 저녁밥을 때우니 잘 시간이다. 놀겠다고 버티는 아이와 싸우던 끝에 산타할아버지를 소환했다. 잠자리에 평화가 찾아왔다. 산타 선물은 택배로 오는 거냐고 아이가 물었다. 아마도, 산타는 요즘 너무 바쁘거든. 해질녘, 로켓배송하느라 잰걸음 종일 놀렸을 쿠팡맨이 짐칸에서 바쁘다. 당일 배송 굳은 약속 지키느라 저녁이 없다. 일 150건 이상 배송, 고객 설문 만점, 무결점 근태를 지키지 못하면 정규직 전환 기회는 없단다. ‘하늘의 별 따기’란다. 계약 해지 걱정에 쿠팡맨은 전전긍긍한다. 별 보며 일한다. 얼마 전 각양각색 옷차림의 택배 노동자들이 노조 깃발 아래 모였다.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한 싸움에 나섰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우산

by 센터 posted Oct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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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우산.jpg


맑은 날 우산 든 사람들이 노조할 권리를 외쳤다. 이미 헌법에 새긴 권리였으니 새삼스러운 얘기였다. 노조 만들었다고 쫓겨난 사람들이 많았으니 매번 새로운 얘기였다. 법이 멀었다. 구호 따라 주먹이 하늘에 가까웠다. 언젠가 비 오는 날 촛불 켠 사람들이 새로운 나라를 외쳤다. 온갖 공약에 선명했으니 지근거리 저 앞이었다. 삐죽 솟은 돌부리가 많아 걸음이 자꾸만 꼬였다. 돌덩이 하나같이 굳은 땅 아래로 깊어 삽자루가 자꾸 튕겼다. 코앞이 멀었다. 기어코 노조 우산 아래 든 사람들도 여전히 길에서 비를 맞는다. 땡볕 아래 붉게 익어간다. 안전장치 없는 현장에서 떨어져 죽지 않으려고 애쓴다. 쨍하고 해 뜬 날 큰 우산 펼쳐 작은 그늘을 지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데칼코마니

by 센터 posted Aug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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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사람들은 부둥켜안고 반쯤 울었고 반쯤 웃었다. 엎드려 절하기를 108번, 때마다 바닥에 소복소복 흰 눈처럼 쌓였다. 입술 앙다물고 참았는데 꺼억 꺽 울음이 비집고 나와 터졌다. 땀인지 눈물인지가 얼굴 타고 흘러 벌건 코끝에 자주 맺혔다. 화장이 제멋대로 번졌다. 끝내 웃음 번졌다. 서로 안고 마주 보는데 울음 또 거기 섞였다. 돌덩이 하나씩 속에 들어 체증이 오래도록 깊었는데, 한결 가벼웠다. 서로를 돌봤다. 더불어 단단해졌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골든타임

by 센터 posted Jul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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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공무직파업선언.jpg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간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고, 비정규 노동자들이 유령 가면 쓰고 광장에 섰다. 미룰 일이 아니라고, 지금 당장 나설 일이라고 팻말 들었다. 꾹꾹 눌러 담았던 얘기 풀어내다 보면 땡볕 아래 회견이 길었다.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였다. 누구나의 상식을 구호 삼아 외쳤다. 퇴행이 오래도록 빠르고 깊었던 탓이다. 꽃도 한 철이다. 오랜 가뭄에 바짝 타들어 가는 게 논밭의 작물과 거리의 나무만이 아니다. 골든타임이 바로 지금이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철망 앞에서

by 센터 posted Apr 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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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망앞에서.jpg


노란 꽃 피던 봄날, 아빠는 차를 몰아 항구에 갔다. 천방지축 갈 길 가늠할 수 없는 아이 뒤를 쫓아 어르고 달래 철망 앞에 섰다. 눈높이 맞춰 앉은 자리 저 멀리에 낡고 삭은 커다란 배가 배를 보이고 누웠다. 상처가 곳곳에 깊었다. 언젠가 아빠는 고개만 겨우 남긴 배를 보면서 아이를 꼭 안았다. 많이 울었다. 잊을 만하면 떠올랐다. 배가 올라왔다. 전 대통령이 철창에 든 날이었다. 침전한 뻘이 갑판에 두터웠다. 돌아와 언젠가의 절망 앞에 선 아빠가 아이를 품고 말했다. 저것이 세월호라고. 삼 년여, 훌쩍 큰 아이는 노란색 리본을 자기가 묶겠다며 들고 뛰었다. 글씨를 좀 쓰자고 겨우 잡았다. 잊지 않겠다고,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또 진실을 인양하라고 아빠는 거기 삐뚤 적었다. 새 시대를 바라는 희망의 문구가 철망에 빼곡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분리수거

by 센터 posted Feb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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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구속행진.jpg


높다란 빌딩 휘황찬란한 강남 대로엔 담배꽁초 따위 쓰레기가 안 보여 말끔하다. 곳곳에 펄럭이던 대형 태극기 아래에 안보 1번지 선전문구가 또렷하다. 명품도시 자부심이다. 오랜 버릇 끊지 못해 또 한 대 꺼내 문 사람들이 안 보이는 구석을 찾아들어 빠끔거린다. 찬바람에, 또 벌금에 벌벌 떤다. 정경유착, 그 버릇 끊지를 못해 수백억 뇌물 꽂던 사람들의 초상이 무개차 위에 수의 차림으로 섰다. 쓰레기통 지나 광화문 소각장을 향한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범죄자는 감옥에 넣는 것이 이치에 맞다. 썩은 내 진동하는 탓에 재활용이 어렵다. 복권 사면 매번 꽝이다. 철저한 분리수거야말로 시대의 과제다. 담배꽁초 따위 말고 비정규직, 정리해고, 노조 파괴 없는 세상이야말로 깨끗한 세상, 명품세상 아니던가.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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